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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강아지

알고보니 질투쟁이

by 연하일휘

솜털처럼 보들거리는 검은빛 털들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다. 노견의 반열에 들어서며, 힘없이 휘어지는 조로의 털결과는 달리, 이 작은 녀석은 털 한 올마다 응축된 생명력이 진하게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사람의 손길에 고개를 맞대어 문지르며, 작은 웃음을 흘리는 녀석의 얼굴은 순박한 시골개의 얼굴 같다. 아직 리트리버 특유의 잘생김이 묻어나지 않는 작은 아가. 갓 2개월이 된, 제 어미의 젖을 떼자마자 입양해 왔다는 래브라도 리트리버는 작은 말티즈인 쵸파를 키우던, 여동생네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


이른 퇴근을 한 날, 조로와 가벼운 산책을 나선다. 타박거리는 발소리에 걸음을 맞추다, 제부의 곁에 있는 검은 덩어리를 마주한 것이 녀석과의 첫 만남이다. 조로의 꼬리가 빳빳하게 세워진다. 간간이 살랑거리는 움직임은 반가움과 경계를 번갈아 나타낸다. 낯선 개를 볼 때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던 조로가 웬일로 얌전하다. 어린 강아지들에게는 아량을 베풀어 주는 성견들도 있다던데, 조로도 그런 것일까. 다급하지 않은 그 느긋한 발걸음에 좋은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으며 거리를 좁힌다.


열 걸음, 여덟 걸음, 여섯 걸음, 네 걸음. 녀석의 이목구비가 명확하게 구별이 될 때쯤, 조로의 발바닥이 거칠게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떠오른다. 어린 강아지의 깨갱 소리가 골목을 울리며, 조로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조로가 녀석을 물어 버렸다. 가족이 되는 첫날, 아픔과 두려움이 뒤섞인 호된 신고식을 거친 녀석은 '덕구'라는 이름을 받고, 여동생네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조로와 덕구는 최악의 첫 만남 이후로도 관계가 호전되지 않았다. 조로는 덕구를 마주할 때마다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단번에 목덜미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좋지 않다. 노견인 조로가 아플 적이면, 출근할 때마다 여동생에게 돌봄을 부탁하곤 했었기에 고민이 깊어진다. 여러 영상들을 보며 관계 개선을 위한 훈련을 시켜보지만, 도돌이표 같은 악순환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될까, 결국은 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말았다.


조로만 했던 그 작은 녀석, 덕구는 금세 내 키만큼 훌쩍 자랐다. 순박한 시골개의 얼굴 위로 잘생김이 덧씌워진다. 맹-하게 보였던 그 얼굴을 제법 좋아했었기에, 리트리버 특유의 잘생김이 오히려 아쉽다. 조로 덕분에 최악의 첫 만남이었지만, 덕구는 내게도 잔뜩 애교를 부리곤 했다. 아직도 자기가 조그마한 줄 아는 것인지, 앉아있을 때면 무릎 위로 올라서는 통에 작게 비명을 내지르곤 했다. 30kg이 훌쩍 넘은 녀석의 애교가 버겁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조로였다. 다가와 온몸을 부비는 덕구의 어리광은 옷 위로 박힌 까만 털들로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소변 실수를 해 본 적 없던 조로는 그 옷 위로 영역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걱정하던 날이 다가왔다. 1박 2일로 잠시 제주도를 떠나야 한다. 조로를 홀로 둘 수도 없는데- 머리를 감싸 쥐는 내게 여동생이 먼저 말을 꺼낸다. 조로와 덕구, 두 마리를 서로 다른 방에 두고 격리해 주겠다는 제안이다. 드디어 찾아온 그날. 비행기에서 내리며, 핸드폰으로 온 사진 한 장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조로와 덕구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대치중이다. 하지만 그다음 사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서로 자신들의 담요가 깔려있는 방에서, 자리를 잡고 누워있다. 눈만 마주쳐도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던 그 조로가 얌전하다.



이후로도 종종 조로를 맡기게 될 때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차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대치하다가도, 이내 각자 자신들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서로 못 본 척, 없는 척. 평소와도 같이 평화롭다는 여동생의 말은 사진이 없었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평화의 순간은 내가 여동생네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마다 깨어졌다.


감사의 인사를 하며, 조로를 품에 안으면 조로의 공격성이 다시 시작된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세라도 달려들 듯 뒷다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이 느껴진다. 품 안에서 뛰어내릴 듯 잔뜩 힘이 들어간 발톱이 피부 위로 파고들며 자국을 남긴다. 수많은 추측들이 오간다.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조로의 질투다.


조로와 산책을 나설 때면, 다른 개들이 없는 시간대를 고른다. 혹여 멀리서라도 다른 개들의 모습이 보이면 다급하게 조로를 품에 안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는 목줄에 캑캑거리면서도, 조로는 다른 개들을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여동생이나 제부, 혹은 간간이 남동생이 조로의 산책을 맡아줄 때는 그런 경험이 없단다. 다른 강아지든, 혹은 고양이든 옆을 지나가거나, 말거나- 긴장감 없는 여유로운 산책길을 즐긴단다. 결국 조로는 나와 함께 있을 때만, 다른 개들을 경계했다.


요 작은 녀석의 두 얼굴이 신기하다. 누나 앞에서는 한없이 순하다가도, 다른 개들 앞에서는 사나워지더니. 내가 없는 곳에서는 순함의 극치만을 보여준다. 여동생네에서도 내가 없을 땐, 제 이불에서 곤히 잘 자는 녀석이, 내가 내려갈 때마다 긴장을 늦추질 않는다. 그러다 덕구가 가까이 다가올때면 평소에는 보기 드문,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는 조로의 모습마저 볼 수 있다. 누나 곁에 다른 개들이 오는 것이 싫은가보다. 요 녀석의 질투심을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덕구를 데려올 때, 가끔 외로움을 드러내는 조로를 위해 나도 한 마리를 분양할까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이미 조로에게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금전적인 문제로 포기를 했던 터였다. 새 가족이 조로의 외로움을 해소하기보다, 질투심만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누나만 바라보는 너니까, 누나도 너만 바라보는게 맞나봐-


덕구와의 첫 만남 이후로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한 살씩 나이가 들며 꽤나 의젓해진 덕구와 조로의 관계는 여전하다. 다만, 덕구도 이제는 조로가 짖을 때면 함께 짖으며 화를 내기도 한다는 것이 달라진 점일까. 또 덕구의 냄새가 묻은 옷 위로 조로가 더 이상 소변을 보지 않는다는 점 역시.


오늘도 개들에게 둘러싸인 삶을 살아간다. 누나만 바라보는 두 얼굴의 질투심 강한 할아버지가 늘 곁을 지킨다. 바로 아래층, 여동생을 보러 갈 때면, 자기가 귀여운 줄 알고 잔뜩 성질을 내는 말티즈 한 마리와, 여전히 작은 강아지때마냥 어리광을 부리는 대형견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돈다. 개들의 모습을 지운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삶을 이어나간다. 코끝에 와닿는 멍멍이들의 냄새가, 이젠 나의 냄새가 되어버린 듯한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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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