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 이전에,
찬 바람이 때린 뺨이 아직도 얼얼한데, 오늘은 그 녀석이 어디론가 쏙 숨어 버렸다. 햇빛도 포근하고, 바람도 불지 않는 따스한 날. 마지막 휴일이라는 슬픈 현실을 꾹꾹 눌러 담으며 이불속에서 늘어지고 만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한낮을 향해 달려가려 하지만, 마지막 게으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오늘은 어머니와 시장에 다녀오고, 조리원에서 퇴소하는 언니를 같이 보러 가고. 해야 할 일이 몇 없지만서도 휴일이라는 이름 위에 새겨진 탓일까. 바쁜 하루로만 느껴진다.
날이 따뜻할 때, 강아지와 산책을 다녀와야 하는데 일정 사이사이의 비어있는 시간들이 증발해 버렸다. 분명 점심을 먹고 외출을 하기 전에 산책을 다녀올 시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나는 지금 운전대를 잡고 있을까. 어머니와 여동생을 태우고 언니네 집으로 향하는 길, 차 안으로 그늘을 슬금슬금 침범하는 햇살이 생각을 멈추어 버린다. 창문 틈 사이로 따스한 바람이 몸과 정신을 노곤하게 만든다.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차가 얼마 없는 도로에서 여유로운 드라이브를 즐긴다.
"형부가 사진을 못 찍네."
실물이 더 예쁜 조카를 보며 이야기를 하자 형부와 언니가 웃고 만다. 어머니는 그 작은 아기를 품에 안아 들고 손주 사랑에 푹 빠져 있다. 도톰한 마스크를 끼고 있지만, 작은 불안함이 남아 있어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집밖으로 빠져나왔다. 언니와 조카에게 혹여 감기가 옮을까, 하는 불안감과 걱정이다.
책장을 넘기는 여유로운 시간은 만족스러운 표정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차에 오르며 마무리가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는 손주 자랑 삼매경이다. 눈은 언니를 닮고, 코랑 입은 사위를 닮고. 아기의 표정이나 몸짓 하나도 잊지 않으려는 듯이, 눈에 담아 온 손주를 그려나간다. 네 자식들은 너희가 알아서 키워- 쿨한 척을 하던 어머니지만, 첫눈에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린 손주에 대한 사랑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귀엽긴 한데, 엄마만큼 푹 빠지지는 않는 듯. 내가 애들을 안 좋아해서 그런가."
"언니는 아꼼이가 언니바라기 되니까, 그때부터 애 이쁘다고 푹 빠지긴 했지."
너무 어린아이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귀엽긴 한데 사랑이 넘칠 정도는 아니었는데. 여동생의 말대로 조카가 이모바라기, 혹은 이모집착남이 된 이후부터 푹 빠져들긴 했었다. 내리사랑이라더니만, 어머니와 달리 나는 사랑을 먼저 받고 내려주기 시작했네.
결국 해가 도망가려 하기 전에서야 강아지와의 산책을 나선다. 온종일 홀로 있던 강아지는 삐졌다는 듯이 목줄을 잡고 현관에서 기다리는 누나를 잠시 외면한다. 결국 신발을 신은 채 엉금엉금 기어 가 쓰다듬어주자 그제야 목줄을 매러 쪼르르 달려 나온다. 개는 주인 닮는다던데, 굳이 잘 삐지는 것까지 닮진 않았음 하는데 말이야.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멈추어 설 때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휴일의 마지막 날, 내일부터 다시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다니. 긴 연휴기간 동안 끙끙거리며 앓은 기억밖에 없는데, 억울함이 밀려온다. 그런 누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종거리다 눈을 마주치는 강아지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 걸려있다.
차 한 대가 옆에 멈추어 선다. 창이 내려지며 카시트에 앉아있던 조카와 눈이 마주친다. 가족끼리 빵을 사러 나갔다 오는 길이란다. 모! 모! 이모를 발견하자 조카는 발을 동동거리며 이모를 불러댄다. 그리고 다시 차가 출발하며 자신의 시야에서 이모가 사라지자 조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녀석, 목청도 좋네. 조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안쓰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조건 없이, 이유 없이 그저 순수한 애정으로 좋아해 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행복해지는 일이라서.
제부가 주차를 하는 동안 먼저 집 앞에 도착해 강아지와 조카를 함께 기다린다. 울음이 그치지 않은 조카는 차에서 내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방긋 미소를 짓는다. 이리 와- 자리에 쪼그려 앉아 조카를 부르자 모모! 모모! 이모를 부르며 도도도 달려온다. 중간까지는 분명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살짝 방향을 틀어 강아지 앞에 도착한다. 이모 벌린 팔은 안 보이니..?
"멍멍! 멍멍!"
조카의 손길이 아직은 억센 탓일까. 몇 번 조카의 얼굴에 상처를 낸 전적이 있기에, 조카와 강아지가 함께 하는 시간을 잘 만드는 편이 아니다. 귀가 들리지 않다 보니, 조카의 손길에 흠칫흠칫 놀라 긴장을 하다 보니 안쓰러운 것도 있지만 말이다.
이모는 강아지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야 하고, 조카는 엄마아빠와 1층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헤어짐을 아는지 조카는 아빠의 품에서 울음이 터져버린다. 오늘 이모가 내일 수업준비 하느라 바쁠 예정이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 동생네로 향한다.
"이모~!!!!"
움무. 모. 모모. 모든 호칭을 다 들었지만, 조카의 입에서 '이모'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또 처음이다. 우와- 감탄사를 내뱉으며 조카를 안아 들자 조카가 그 단어를 또 따라 하며 안경을 채가버린다. 어르고 달래며 안경을 돌려받으니 새로 산 장난감을 보여준다며 손가락을 꼭 쥐고 나를 끌고 간다.
"나 얘가 '이모' 소리 하는 거 처음 들었어."
"그거 언니 앞에서만 안 하더라. 우리 앞에서는 이모 보고 싶다고 '이모' 소리 많이 해."
처음으로 또렷한 발음으로 '이모'를 듣게 된 날. 먼저 사랑을 베풀어준 조카가 예뻐 다시 끌어안는다. 네게 받은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돌려줄게. 고맙고 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