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밥은 먹어야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뺨을 찰싹거린다. 봄날씨마냥 따스하던 햇살은 어디로 사라지고, 아침에는 찬 기운이 듬뿍 담긴 강풍주의보만 남아 있다. 날이 좋으면 학원에서 벗어나 놀러 가고 싶은 마음에 들썩거릴 테니, 차라리 추운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사실 출근하기 싫어! 를 외치는 것은 어떤 날씨든 비슷할 것도 같은데. 야속한 바람이 빨리 출근을 하라며 등을 떠미는 월요일 아침이다.
오후부터는 비 혹은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다. 출근을 하려 어깨에 맨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제 널어 둔 빨래를 이제야 기억해 낸 탓이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해진 듯, 옥상 바닥이 익숙한 색상들로 수놓아져 있다. 바람이 어찌 강하게 불었는지, 옷걸이에 걸어 널어 두었던 옷들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그래도 옥상 너머로 날아가지 않아 다행인 건가. 얌전히 널려있던 빨래와 바닥을 뒹굴거리던 빨래를 양손에 나눠 들고 집안으로 휙휙 던져 놓는다. 반은 건졌다는 뿌듯함에 출근을 하다 내 실책을 깨닫고 말았다. 분명 우리 멍멍이가 그 위에서 뒹구르르르 할 것 같은데. 결국 걷어둔 빨래들 모두 재세탁 당첨이다.
오늘따라 유독 장난기가 넘쳐나는 예비 중1 녀석들 덕에 목이 잠겨버렸다. 초등학교 시절보다 조금 더 의젓해지긴 했지만, 친구와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터지는 요 녀석들은 선생님의 기력마저 쏙 빼내가 버린다. 그래도 눈빛만은 '열심히 할게요!'를 외치고 있어 미워할 수 없는 개구쟁이들이다.
바람이 창틀을 흔들어댈 때마다 몇몇 녀석들은 힐끔거리며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낸다. 갑작스레 추워지는 날씨에 눈을 기다리는 반짝임이다.
"바람 진짜 많이 부네. 쌤 오늘 아침에 빨래 걷는데, 바람 때문에 빨래들이 바닥에 다 떨어져 있더라."
"와! 쌤 빨래 다시 해야겠네요!"
한 녀석이 기쁨에 찬 탄성을 보내더니 저 혼자 큭큭거린다. 옆에 앉은 친구들이 고자질을 시작한다. 얘 쌤이 고생한다니까 좋아해요- 아이들의 말에 더 흥이 났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까지 추려하는 녀석이다.
"와- 너 지인짜 못됐다. 완전 나쁘네!"
장난기 어린 타박에 오히려 기분이 좋다는 듯 어깨춤은 더 흥겨워진다. 내가 못 산다, 정말. 목이 나가기 직전에서야 수업이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수업 내내 유심히 살피던 한 학생을 따로 불러냈다.
"요즘 네가 너무 잘하고 있고, 오늘도 장난 안 받아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거든. 쌤이 요새 다른 쌤들한테도 계속 너 칭찬하는 거 알지?"
칭찬으로 운을 띄우니 애가 배시시 웃는다. 오히려 중학생이 되며 아이가 더 순수해진 느낌이다. 이전에는 장난의 도가 지나친 탓인지, 선생님들에게도 상처가 되는 말을 많이 했던 아이인데. 마냥 귀여워만 보인다.
"다시 앞자리 앉는 건 어때? 쌤이 강요하거나 시키는 건 아니고, 그게 네가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장난기 어린 표정과 행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수업 시간에 집중하려는 태도가 너무나 좋아졌다. 그래서 종종 개인적으로 불러내 칭찬을 하고, 격려도 해 주고 있었는데 오늘은 좀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워낙 장난꾸러기였던 탓일까, 태도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아이를 향한 장난이 끊이지를 않았다. 수업에 집중하려고는 하지만, 옆에서 툭툭 치는 장난을 다 무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마음을 다잡은 아이가 다시 흔들릴까 걱정이 된다.
"앞자리에 앉았을 땐, 뒤돌아보지 않으니까 00이가 네게 장난도 못 치는 것 같더라고. 강요는 아니고 쌤이 그냥 제안만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는 말고."
장난 좀 그만 치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질 않으니, 결국 남은 것은 장난을 받아주지 않게 만드는 것을 택한다. 작은 칭찬을 곁들이며 조심히 집에 들어가라는 인사를 건넨다.
빗자루를 들고 강의실을 쓸다가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있다. 25분 정도의 여유시간, 분명 청소도 하고 점심을 먹기에 아슬아슬하게 맞는 시간이었는데 짧은 상담 덕분인지 5분이 남았다. 음,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만 데워도 수업 들어가야 할 시간이네. 왠지 이 빠듯함이 익숙하다.
지난번에도 이랬었다. 그때는 상담이 아니라 보강 덕분에 홀로 청소를 한 탓이었다. 어디 가서 화풀이를 할 수도 없고, 그때는 점심을 굶을 수밖에 없던 날이었다. 주린 배를 안고 수업을 하다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도시락을 싸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이번에도 점심을 굶으면 정말 많이 속상할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우선 질러본다.
오늘은 먹을 수 있든 없든 도시락을 데운다. 띵-하는 소리와 함께 수업 시작 시간이다. 휴게실 한 구석에 도시락을 고이 올려놓고, 수업에 들어간다. 숙제를 적어 문제집 앞에 붙여 주었는데, 그게 없어서 숙제를 안 했다며 당당하게 외치는 아이의 모습에 작은 한숨이 입안을 맴돈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서 무엇하리. 하지만 고픈 배가 신경을 콕콕 찔러댄다.
책을 넘기다 속으로 탄성을 내지른다. 교재에 찍혀 있는 QR코드가 반가운 것은 또 처음이다. 태블릿을 꺼내 영상을 틀어주니 약 5분 정도의 길이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열어둔 강의실 문 가까이에서 이미 식어버린 도시락을 오물거린다. 짧디 짧은 그 5분이라는 시간 동안 간신히 반정도를 먹고, 다시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이 마무리되고, 조금 늦는 다음 수업 아이들을 기다리며 남은 도시락을 먹는다. 급히 먹느라 속이 영 불편하다. 슬며시 고개를 드는 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괜히 서글프다. 분명 수업과 수업 사이에 쉬는 시간이 길면 그만큼 퇴근이 늦어지기에, 짧은 시간을 선호하던 것은 나였다. 하지만 막상 굶어야 하거나, 이리 급하게 밥을 먹는 내 모습이 왜 이리 불쌍하게 느껴지는지.
사람은 역시 밥심이다. 괜한 서글픔과 불쌍함도 배가 든든해지니 적당히 흘려보내게 된다. 그래, 내일부턴 청소 시작 전에 미리 도시락을 돌려놓자. 어떻게든 밥 먹는 시간은 꼭 사수하리라. 열심히 싼 도시락도 먹히지 않는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