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조각에게 속아버렸다.
한차례 강하게 불어온 바람이 소리를 만들어냈다. 차르르- 쓸려 내려가는 소리와 바닥에 닿는 소리가 엇비슷하게, 지붕에 쌓여있던 눈뭉치가 떨어진다. 밤새 눈이 더 쌓일까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어제보다는 조금 포근해진 듯 잘게 부서진 얼음조각들이 주위에 널려있다. 녹아내린 물이 신발 아래로 찰박거린다. 거리에는 이미 물기들조차 거의 다 말라 있다.
두껍게 내려앉은 구름은 높은 건물을 폭 덮어버릴 것만 같다. 그 두툼한 틈새로 가끔 얼굴을 내비치는 햇살을 질투하는 듯, 강한 바람이 금세 틈을 막아버려 빛을 쫓아내 버린다. 그럼에도 북쪽 하늘에는 간간히 파란 하늘이 스쳐 지나간다. 날이 조금은 풀리려나보다. 쌓이는 눈과 얼지도 모르는 도로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담아 두게 된다.
아래층의 계단은 물기만 남아있을 뿐, 눈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만, 위층의 짧은 계단에는 자잘한 얼음 조각들이 마지막 흔적을 드러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지퍼를 위까지 올려 바람에 대한 방비를 단단히 한 뒤 집을 나선다. 두어 걸음 계단을 내려가다 몸이 붕 뜨는 느낌에 잠시 넋이 나가버렸다. 다급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움직이지만 조금 늦은 대처였다.
계단에 남아있던 흔적들은 녹아내리던 얼음 조각이 아닌, 두툼하게 얼어버린 빙판이었다. 잘못 밟고 미끄러지며 계단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몇 칸 되지 않는 계단인 데다 앞쪽에 벽이 있어 다리를 뻗어 몸을 멈추었지만, 그 반동으로 계단 모서리에 등을 강하게 부딪히며 얼얼한 통증이 밀려온다. 그래도 허리가 아닌 게 다행이네. 놀라며 가빠진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다. 부딪힌 등에서 욱신거림이 찾아오지만 다른 곳을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하다.
추위에 잔뜩 움츠러든 상태였어서, 근육이 놀랐을까 슬슬 걱정이 밀려온다. 이런 날은 찜질이라도 하며 푹 쉬어주는 것이 가장 최고인데,
"계단에서 미끄러졌어요. 다치지는 않았는데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차마 이 말을 꺼내지는 못하겠다. 욱신거리는 등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출근길을 이어나간다. 부딪힌 허리보다 엉덩방아의 충격이 큰 듯, 골반쪽으로 얼얼함이 느껴진다. 수업을 진행하다 창틀이 여러 차례 강하게 흔들리며, 덜컹거리는 소리에 나도 학생도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만다. 바람과 함께 눈이 휘날리며, 허공을 하얗게 물들인다. 운전이 가능하겠냐는 원장 선생님의 걱정에도, 다행히 눈송이들은 땅에 닿는 족족 녹아내린다. 그래도 쌓이지만 않으면 집에는 갈 수 있을 테니까.
비와는 달리 시야를 가리는 눈은 조금 더 까탈스러운 느낌이다. 물방울과 눈송이가 동시에 차창을 공격해 댄다. 와이퍼가 열심히 일을 하지만, 저 멀리 보여야 할 건물들이 뿌옇게 흐려진 것을 보면, 마치 안개라도 낀 것만 같다. 도로에 앉는 눈송이들이 하나둘씩 제 생명을 이어나간다. 군데군데 하얀 얼룩이 지는 장면을 바라보며, 불안감과 조급함이 함께 찾아온다.
눈이 쌓이기 전, 집에 도착했다. 차창으로만 달려든다 생각했던 눈송이들이 번호판에도 소복이 쌓여있다. 도톰하게 덧칠된 눈송이들 덕에 번호들도 보이지 않는다. 적당히 발로 툭툭 털어내다 계단으로 생각이 미친다. 아, 얼음이 거의 녹아내렸을 텐데,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였겠네. 바람이 등을 떠미는, 계단을 오르기가 무서워지는, 집으로 들어서기가 무서워지는 퇴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