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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를 베풀 수 없는 사회

모르는 사람 차 타고 학교 갔어요.

by 연하일휘 Mar 16. 2025

"쌤, 저 모르는 사람 차 타고 학교 갔어요."


새벽부터 아침까지, 간헐적이지만 거세게 비가 쏟아진 날이었다. 비가 그쳤나 싶으면 잠시 뒤에 다시 거세게 쏟아붓고, 태풍이라도 오려나 의심이 들었던 날. 우산 없이 등교를 하던 아이가 갑자기 쏟아진 비에 가게 처마에서 비를 피하던 중이었단다. 뛰어가기엔 너무 거센 빗줄기라 발만 동동 구르다 집에 전화를 걸었던 그때, 한 아주머니께서 아이에게 말을 건네셨다.


아이는 부모님과 통화를 하며 아주머니의 차에 올라탔고, 덕분에 비를 맞지 않고 등교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해 준다. 등줄기를 흐르는 소름과 함께 찾아온 혼란스러움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아이의 친구였다.


"야, 너 미쳤어?"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다. 나 역시도 그 친구의 말에 동의를 한다. 너 큰일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야-


아마 그 아주머니는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를 보고, 선의를 베푼 행위였을 테다. 내 딸도 등교를 하다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 모습을 비춰 보며 어찌할 바 모르는 작은 아이를 데려다주었을 터인데, 입맛이 씁쓸해진다. 좋은 분을 만났구나- 아이의 감정에 공감을 해 주기 이전에 걱정 어린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에 아주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다.


아이도 좋은 분을 만나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고, 아주머니 역시 한 아이를 도와주며 작은 행복감을 느끼셨을 텐데. 그러한 좋은 감정들을 덮어두고 아이에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게 된다. 선의의 행동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또 다른 선의를 베풀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흉흉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혹시나'하는 걱정 하나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너무 좋은 사람 여덟명 정도가 있으면, 나쁜 사람이 둘 정도 있어. 그런데 그 나쁜 사람 둘 때문에 우리는 다른 여덟명의 좋은 사람들의 호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야."


조금 시무룩해진 아이에게 달래듯 이야기를 해 보지만, 생각이 많은 표정이다. 옆에 있던 친구 역시 나쁜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냐며 걱정 가득한 말을 건넨다. 착한 아주머니의 선의를 대상으로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는 것이 옳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이후에도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타는 것에 대한 경각심이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분명 선의로 가득했던 좋은 상황이었을텐데도.


선의를 베풀 수 없는 사회, 그리고 선의를 받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간다.



Pixabay



예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기에 초등학생 몇 명이 카운터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과자를 사려는데, 300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내가 대신 내 줄 수도 있었지만, 갓 20살이 된. 그리고 5천원도 되지 않는 최저시급을 받는 상황에서, 그리고 많은 초등학생들이 찾아오는 편의점에서 쉽사리 대신 내 준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시던 한 아주머니께서 대신 지갑에서 300원을 꺼내 건네신다.


"이번에는 아줌마가 보태주는데, 절대 다른 사람들이 뭐 사준다고 하면 덥석 받고 그러면 안 되는거야."


또래의 아이를 키우신다던 그 아주머니는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강조를 하셨었다.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신 하고서 신이 나 편의점을 뛰쳐나간다. 아주머니는 흐뭇해하시면서도 조금은 걱정 어린 표정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호의에서 잘못된 개념을 배우지나 않을까. 모르는 사람이 사탕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어쩌나-하는 걱정이었을 테다.


선의를 베풀어도 그로 인한 걱정이 계속해서 뒤를 잇는다. 혹여 아이들이 모든 행동들이 선의에 기반된 것으로 믿고 나쁜 사람들에게 해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다. 세상에 착한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좋았을텐데, 종종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나쁜 몇몇의 사람들이 역시 문제다.


나쁜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구분을 할 수 없다. 한동안은 나이드신 할머니의 짐을 대신 들어드리는 것조차 아이들에게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돌던 시기가 있었다. 도움을 요청한다면 당연히 어른에게 요청을 하는 것이지, 너희처럼 어린 아이들에게 짐을 들어달라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며. 할머니들을 이용한 인신매매에 대한 괴담이 한창 퍼지던 시기였다. 우리가 당연히 '선의'라고 믿던 행동들이, 범죄에 악용되는 그런 상황들에 아이들도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차라리 착한 사람은 착한 외모를, 나쁜 사람은 나쁜 외모를 지니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르는 아주머니의 차를 타고 온 아이는 "그래도 어디서 본 것 같은 아주머니였어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네 눈썰미 믿으면 안 돼. 너 처음에 나 봤을 때 뭐라 했는지 기억나잖아-"


쌤 너무 착하실 것 같아요- 라며 나의 첫인상을 정의내렸던 아이다. 멋쩍은 듯 배시시 웃는 아이가 조금 안쓰럽다.


만약 내가 비를 맞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마주한다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혹여 선의를 오해받는 일에 대해 경계를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도 조심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작은 씁쓸함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 아이를 태워다주며 걱정어린 잔소리가 더해질 지도. '원래 모르는 사람 차 함부로 타는거 아냐-'라면서 말이다.


선의를 베풀기가 어렵다. 그리고 선의를 받아들이는 일도 더욱 어려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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