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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와 허무 사이를 걷는 일

어느 여름날의 해무를 바라보던.

by 연하일휘

-여름, 그 어느 날.


해무란 단어를 내뱉을 때면, 단어 자체의 의미보다 발음이 먼저 와닿는다. 크게 입을 벌리지 않아도 되는, 작게 오물거리듯이 발음하는 해무. 바다의 안개라는 느낌 있는 뜻보다도 그 발음이 좋아 종종 입 밖으로 꺼내게 된다. '해무'라는 단어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허무'라는 단어가 연결 지어진다. 비슷한 초성이라서 그런 것일까. 혹은 뿌옇게 가려진 모습에서 텅 비어있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게 된 것일까.


한동안 비가 내리고, 흐린 하늘이 이어졌다. 습한 공기가 집안을 가득 메운 탓일까, 작은 어긋남에도 쉽게 감정이 요동을 친다. 한때 교수님께서 물어보셨었다. 네가 사는 곳도 습하냐고, '습하지 않은 곳'은 어디냐고. 대학교의 위치가 한라산과 가까운 곳이라, 재학생들이 종종 '산 1번지'가 주소라며 농담을 하곤 했었는데. 그곳도 습하다고 느껴지신다고 하셨었다. 내가 사는 곳은 바다까지 걸어서 20분도 안 걸리는 곳이니,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습도가 낮을래야 낮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오래된 집이라서 비가 오면 집 안으로 종종 물이 스며든다. 대체 어떻게 비가 내리면 저 높은 벽이 축축이 젖을 수 있지. 가로로 내리는 비가 벽 너머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탓에 부모님 댁에서 슬쩍 제습기를 받아와 사용도 했었다. 전기세 폭발을 감수하며 사용하던 제습기가 어느 날부터인가 '삐-'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거 뭔가 잘못되었는데. 전기세 폭발이 아닌, 제습기 폭발이 일어날까 겁이 덜컥 난다. 구입한 지 10년은 족히 되었을 녀석이라 보내줄 때가 되었나 보다. 결국 제습기 없이 지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집안의 습기들이 신이 나서 들러붙기 시작한다.


며칠을 내리 습기와 다투다 보니 처음엔 요동치던 감정이 나중에는 아예 바닥에 드러눕는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가장 좋은 건, 역시 드라이브와 바다 구경이지. 기운 좀 차리라며 선물 받은 기프티콘을 사용할 요량으로 홀로 운전을 시작한다. 한동안 습도가 높고 또 높았으니, 바닷가를 가면 멋진 해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맛난 커피와 멋진 정경을 위해 해안도로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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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가득 차 있을 주차장이 비어있다. 몇 대 없는 차들 사이에 주차를 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본다. 평소라면 짙은 파란색이었을 바다가 어두컴컴한 남색으로 물들어 있다. 해무라 하기에는 그저 먼 수평선이 조금 옅어진 정도. 실망보다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위안을 입안으로 삼킨다. 안개가 짙었다면, 운전이 위험해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였을 테니, 그저 평소와는 다른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검은 바위들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꽤나 기분이 좋다. 그리고 바다만의 그 비릿한 짠내가 짙은 날이다. 늘 맑은 날의 바다만 보러 오다 흐린 날의 바다는 색다르다. 에메랄드빛 혹은 파란빛을 띠는 바다 대신, 흐린 하늘과 짝을 이루듯 어두운 바다의 색상. 짙은 남색, 그리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이 밤바다를 떠오르게 한다. 물에 취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걷는 것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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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이 운동을 하며 해안가를 달린다. 바다를 구경 나온 모녀들의 모습, 관광품 판매점에서 나오는 가족들의 모습. 차도 사람도 얼마 없는 바닷가를 걷다 저 멀리 뿌옇게 안개에 가려진 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장막을 걸친 건물들의 모습이 낯설다. 어렴풋한 외곽선을 따라 드러난 그 모습은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이다. 남동생의 부탁으로 흐린 날 지대가 높은 곳으로 운전을 한 적이 있었다. 짙은 안개에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코 앞에 왔을 때야 보이는, 그때의 그 두려움이 떠올랐다. 짙은 안개는 두려움과 함께 신비로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옅은 안개는 안개 너머에 있는 무언가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훑어보게 만든다.


텅 비어 있는, 그리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허전하고 쓸쓸함이 느껴지는, 그것이 '허무'라고 한다. 해무에 가려진 건너편의 모습은 비어있다. 장막 너머에 비치는 모습들이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해무를 발음할 때면, 허무라는 단어가 뒤따라오는 것은 안개에 가려진 그 무언가의 존재들이 지워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옅은 안개 너머를 살피다 등을 돌린다. 작게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몇몇의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어우러진다. 흐린 공기층이 형성되어 있다. 그 사이를 지나가며 짧은 산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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