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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고, 이모는 늙어가요.

후들거리는 팔을 붙잡으며.

by 연하일휘

작은 몸이 부풀었다 사그라들 때마다 작은 진동이 전해진다. 그 조그만 몸 어디에 숨을 곳이 있다는 것인지, 가래 섞인 기침을 시작했다. 숨을 크게 쉴 때마다 가르릉 거리듯 전해지는 진동이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지만, 많이 힘겨운 듯 칭얼거림으로 답을 한다.


아버지 병원 진료가 있던 날이지만, 수업을 빼질 못했다. 결국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기만 하고, 진료가 끝나면 택시를 타고 내려오시라 부탁을 드렸다. 약국에서 약을 대신 찾아올 테니, 추운데 있지 마시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퇴근 후, 짜증이 심해진 조카를 달랠 겸 함께 약국으로 향했다. 감기가 심해지더니 요즘 짜증과 울음이 잦아졌다. 창밖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은 듯하더니, 금세 울음을 터트리며 안아달라 보채기 시작한다. 간식과 장난감으로 달래려 하지만, 곤두선 조카는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질 않는다. 운전 중인 여동생은 떼를 써도 내려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조용한 목소리로 조카의 이름을 불러준다.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에 그저 토닥이며 짜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엄마랑 빵 사고, 할무니 할부지랑 먹자."



울음소리가 줄어들 무렵 꺼낸 말에 조카의 표정이 밝아진다. '빵'이 좋은 것인지, '할무니, 할부지'가 좋은 것인지, 금세 짜증을 멈추고 발을 동동거린다. 빵집에 도착해 조카가 좋아하는 빵 하나를 손에 쥐어주자 잔뜩 신이 났다. 할머니한테 까달라고 할까? 며칠간 감기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지 못한 덕분인지, 빨리 까달라는 재촉도 없이 두 손으로 빵을 움켜쥔 채 얌전히 카시트에 앉아 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하니 빵을 들고 할머니에게 달려가 까달라며 잔뜩 애교를 부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식욕이 없는 듯 한 두입을 먹더니만 다시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빵을 먹지도 않고 그저 손에 쥐기만 한 채로 칭얼거리는, 아픈 손주의 모습에 부모님의 미간이 좁혀진다. 아픈데, 찬바람 쐬다가 심해지면 어쩌려고- 손주의 얼굴을 보니 기분은 좋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를 못하신다.


짧은 드라이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조카가 저녁을 먹는 사이, 나는 조용히 집으로 올라왔다. 분명 점심을 든든히 먹었건만, 굶기라도 한 듯이 뱃속에서 밥을 내놓으라며 난리를 피운다. 라면 하나를 끓이고 먹는 사이, 여동생이 걸어온 영상통화에는 대성통곡을 하는 조카의 모습이 담겨있다.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한단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조카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애착이불을 품에 안은 채, 도도도 달려온다.


평소라면 등을 빳빳이 세운 채, 가고 싶은 곳을 손으로 가리키거나 혹은 금세 내려달라 할 녀석인데. 이모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칭얼거림만 이어간다. 소파에 앉는 것도,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잔뜩 성을 내는 통에 등을 토닥이며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한창 기어 다닐 시기에나 이리 품에 오래 안겨 있었는데, 오랜만에 조카를 품에 안고 달래주는 날이다.



"오늘은 씻어야 해. 어제 미열 있어서 못 씻겼어."



씻고 있는 조카를 보니, 그새 또 자랐다. 아닌가, 살이 빠져서 더 길어 보이는 걸까. 매일 보고 있음에도 훌쩍 길어진 모습에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이모 손가락보다도 작았던 발이 엊그제 같은데, 좀 있으면 이모 허리까지 커버릴지도 모르겠네.



"와, 또 컸네. 그새 또 쑥쑥 커버렸네."



내 감탄사를 들은 어머님(여동생의 시어머니)이 맞장구를 치신다. 문제는 조카의 시점에서 치는 맞장구 중 하나가 묵직하게 명치를 치고 들어온다.



"나는 쑥쑥 크고, 이모는 늙어가요."


"어머니, 그건 언니한테 너무한 말인데요?"



갑작스레 들어온 나이 공격에 웃음을 터트리자, 여동생이 어머님께 대신 타박을 건넨다. 안 그래도 나이 드는 거 서글픈 이모한테, 어머니가 너무 했다- 여동생의 타박에 별생각 없이 하신 말씀인지 어머님도 사과를 건네신다.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는 문장이긴 하지만, 꽤나 강력하게 들어온 한 문장이다.


여동생도 종종 내뱉는다. 엄마아빠 기력을 쏙 다 빼가며 아이가 커가는 것 같다고- 이를 증명하듯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아픈 만큼 쑥 커 있는 조카와 핼쑥해져 있는 여동생과 제부의 모습이 대조된다. 요즘은 엄마 아빠 기력뿐만 아니라, 이모 기력까지도 쏘옥 다 빼가는 모양이다. 든든하게 밥을 먹어도 조카를 돌보고 나면 금세 허기가 지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닐 테다.


목욕을 하고 나른해진 조카가 안으라며 어리광을 부린다. 애착이불을 꼭 쥔 채, 이모 어깨에 기대 코- 코- 라며 자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젠 한 팔로 안기에는 무거워졌지만, 팔이 후들거리면서도 계속 안아 들게 되는 것은 애정 때문인 것일까. 때론 팔이 후들거리다 다음날 지끈거리는 근육통에 시달리곤 하지만, 품에 안은 이 작은 것의 온기가 통증을 녹여버린다.


어머님의 말 대로, 아가는 쑥쑥 크고 이모는 늙어간다. 네가 듬뿍 자라는 동안, 늙어가도 좋으니 우선 아픈 것만 빨리 낫자. 어제보다 줄어든, 거의 느껴지지 않는 진동에 안도하며 아가를 품에 안은 채,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린다. 작은 하품이 전해진다. 푹 자고,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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