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함이 짙어질 무렵 점점 더 먼 곳으로 제 흔적을 남기듯이.
미지근하게 데워진 공기가 방 안을 맴돈다. 몸을 일으키며 바스락거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봄을 맞이하며, 겨우내 안락한 보금자리였던 난방텐트를 담아둔 덕분이다. 따스하지만 허전하다.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폐쇄된 공간이 주던 안정감이 아쉽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그때와 달리 따스한 공기가 주는 활력에, 조금 더 넓어진 공간을 만끽해 본다.
간간이 화면에 뜨는 강풍 주의보에 맞춰 창틀이 흔들린다. 만개한 벚꽃들이 스러지기 시작하는 요즘, 마지막 생명력들이 바람에 흩날릴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강아지를 안고 문을 나선다.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벚꽃들을 마주하기 위함이다.
벚꽃비 사이를 걷는 강아지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꽃잎 한 두 개가 머리 위로, 혹은 등 위로 내려앉는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이미 바닥에 흩뿌려진 꽃잎들이 발자국에 맞춰 짓이겨진다. 예쁜 선홍빛이 제 빛을 잃어가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봄이 완연하게 찾아왔음을 느끼게 한다.
"쌤, 축제인데 벚꽃 못 보는 거 아니에요?"
"날이 따뜻해서 며칠 내로 만개할 것 같은데?"
벚꽃 축제 며칠 전,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던 아이들은 속상함을 토로했다. 아직 꽃망울만 맺힌 벚나무를 바라보며 축제를 즐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더해졌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 축제 당일에는 만개한 벚꽃을 마주했다며 아이들은 신이 나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 틈새에서 서로 잃어버릴까 손을 꼭 잡고, 잔뜩 사진을 찍으며 놀다 왔다는 후일담을 전한다.
아이들의 염원이 닿았던 듯, 축제 기간 동안에는 따스했던 공기는 돌연 차갑게 식어버렸다. 찬 기운을 담은 바람이 벚나무를 뒤흔들며 꽃잎비를 흩뿌리는 장면을 마주하며 어머니가 말을 내뱉는다. "축제를 지금 했어야 했는데." 나무에 가득 만개했던 벚꽃들이 하나 둘 떨어지며, 바닥을 수놓는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바닥에 새겨진 무늬들만으로도 벚나무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시기다.
제 주변에만 그 흔적을 흩뿌리던 벚나무는 바람에 꽃잎 한 두장을 더 흘려보낸다. 집 앞에서 제 색을 바래가는 꽃잎 한 장을 발견했을 때, 차가운 공기도 따스해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동네 산책을 하는 길, 몇몇 어른들은 집 앞으로 하나둘 쌓인 꽃잎들을 쓸어내고 있다. 걷는 것이 즐겁다. 옷을 잔뜩 여미면서 작은 공간 안으로 파고들던 것이 엊그제인데, 봄기운은 조금 더 넓은 공간으로 발을 이끈다.
겨울은 폐쇄적이다. 추위는 온기를 보존할 수 있는 작은 공간 안으로 파고들게 만든다. 집 안, 집 안에서도 작은 난방텐트 안으로. 밖을 나서면 작은 자동차 안으로. 출근 후에는 작은 난로 앞으로. 따스함이 번지는 시기가 되면, 그제야 작은 공간이 점차 넓어진다. 걸음을 옮겨 조금 더 먼 곳으로 나아가고, 제 빛깔로 물들어가는 풍경을 보기 위해 먼 거리를 나서게 된다. 꽃잎들이 제 주변만을 물들이다, 따스함이 짙어질 무렵 점점 더 먼 곳으로 제 흔적을 남기듯이.
봄이 온 것이 즐겁다. 봄이 오며 함께 찾아온 따스함이 반갑다. 꽃비 사이를 아가와 함께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요즘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