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가장한 인생의 모순

- 양귀자, 『모순』을 읽고

by 여노

사랑은, 허망함을 포용하는 낙관의 승리이다. 그 끝엔 언제나 절망이 도사리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영원을 품고 허망함을 초월하거나 격파할 수 있다고, 아니 이미 해냈다고 자신한다. 넘치는 기대로 때때로 실망하면서도 어느 순간 사그라질 마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시작된 적 없는 사투를 홀로 벌이면서 죽음 따위를 걱정한다. 곧 공허해질 마음과 싸우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겨룰 힘이 없는 마음이다. 동력이 전무한 허망한 마음에 힘껏 애정을 싣고 달리라 박차며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절벽을 내달리는 그대들이여. 그러니까, 안진진,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이기적인 사랑을 쥐려는 너를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낙관을 견지하는 용감한 인간이라서.


안진진은 현실과 몽상을 연상시키는 묘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상을 보내는 인물이다. 어머니와 이모, 이모부와 아버지, 나영규와 김장우. 안진진은 두 가지 갈림길만 볼 줄 아는 인간이라 넘치는 불행으로 삶의 부피가 큰 어머니와 공기 같은 행복으로 얄팍한 부피의 이모만 보고, 정시에 도착하는 기차 같은 이모부와 불시착하듯 가끔 귀가하는 아버지만 보고, 조각난 시간을 배열하는 기획자로 사는 나영규와 아지랑이처럼 외부에 이끌리듯 흐릿하게 생활하는 김장우만 본다. 대단한 결심으로 젊음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던 안진진의 비장함은 고작해야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고민을 종결하는 결혼으로 향한다. 그것은 안진진이 똑닮은 이모와 어머니를 보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만을 상상했고, 그 둘을 다르게 만든 것은 결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안진진에게 결혼은 이모부와 아버지 중 누구를 택할지, 그래서 이모가 될지 어머니가 될지 정하는 중대사이다. 스스로가 말하듯, 다른 길도 있겠지만, 과년한 그에게 적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안진진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를 다 닮진 않아서, 거칠게 말하자면, 제 분수를 안다.


그러니 그가 김장우가 아니라 나영규를 택한 것도 지극히 안진진다운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착하고 착한 안진진”이라는 말을 할 때조차 흐릿한 김장우 앞에서 놀랍도록 선명해지는 안진진은, 으레 그랬듯 이모를 만나면 선명해졌고 이모의 마지막 편지로 더욱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그토록 선명한 안진진은 경계가 흐린 김장우와 교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니까. 의심할 줄 모르는 순박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흐릿함은 낭만적이기야 하겠으나, 그야 낭만이 본디 형체를 뒤집어 쓸 수 없는 헛것이라 그런 것이고, 어쨌든 두 발은 땅을 딛고 섰으니 하나가 순박한 만큼 남은 한 사람은 혹독하게 현실적으로 살아가며 나뒹구는 먼지를 헤치고 선명한 계산을 해야만 한다. 그 풍파는 육신을 쇠약하게 만들고 노화를 앞당기며 불행으로 건전지를 갈아 끼우고 잠깐의 생기를 찾는 데에 익숙해지게 한다. 안진진의 어머니처럼.


그러나, 안진진이 대단히 현실적이라 생사라는 인생의 모순을 껴안고 자기 삶의 양감을 줄이고자 나영규를 택한 것은 아니리라. 나영규는 이모부가 아니었다. 정시에 도착해야 하는 기차는 아무리 곤란할지라도 정해진 선로를 이탈하지 않고 제동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모부는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 예측가능함이 주는 강박에 따르도록 이모를 옭아매듯 앞만 본다. 새벽에 찾아온 아내의 언니에게 자기 딸의 시험일정을 알리며 조용하라 이르지만 내쫓지 않는다. 기념일에 찾아온 불청객 같은 처조카를 무시하는 대신 아내의 유도에 따라 적절히 관심을 안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 달리 말해, 맞부딪히지 않는다. 충돌한 기차는 결코 정시에 도착할 수 없다. 그러니 이모부는 충돌할 일을 만들지 않고, 이것은 이모의 ‘행복’이 된다. 하지만 나영규는 가뿐히, 선로를 지워버린다. 그는 안진진을 탓하며(“이제 보니 진진씨 나쁜 사람이네”) 너스레 떨고 진진에게 필요한 쉼표를 내던질 줄 아는 사람이다. 이모부와 마찬가지로 충돌할 일을 만들지 않지만, 정시에만 도착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정해진 선로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면 언제든 버리고, 충돌보다는 연착을 택한다. 그래서 안진진은 나영규 앞에서 솔직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영규는 조각난 시간을 끼워 맞추는 데에 능하고, 자신의 능숙함에 감탄할 준비를 마치고서 완성될 퍼즐을 상상하고 들뜨는 인간인 동시에 외부의 충격으로 흩어진 조각을 다시 한 데 모으는 것에도 능한 인간이며, 뜻밖의 충돌이 자신의 유능함을 일깨워줄 도발적 사태임을 상기하며 짜증스러운 번거로움을 감수할 인간이다.


그리고 안진진도 이모가 아니다. 비장하게 내면으로 파고들어 칼날 쥐듯 문장을 쓰는 안진진은 보랏빛 라일락에 감탄할 만큼 삶에 여백을 남기지 않는 인간이다. 안진진은 삶에 무용함이라는 공백이 생길 것 같으면 새벽반 학원이나 요가 따위를 우겨넣어 어떻게든 채우며 살아간다. 안진진은 외부의 요청에 응할 것을 결심하고, 이 결심에 수긍하도록 외부에 요구한다는 점에서 요구할 줄 몰랐던 이모와 다르다. 안진진은 신발을 사달란 동생의 말에 긴 외출을 흉내 낸 가출을 했고 훈장처럼 신발 몇 켤레를 안고 귀가했으며, 외롭고 심심하다는 친구의 토로에 소풍가듯 가벼운 걸음으로 두어 달 가출했다.


안진진의 가출은 자극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며 반동을 꾀하는 도발적인 생의 충동을 보여준다. 안진진은 착하지 않아서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고, 요구하고 또 요구해서 나영규를 움직였다. 다시 한 번, 안진진의 삶에는 여백이 없다. 그녀가 한 모든 선택에는 이미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의 삶에는 약점이 물감 새듯 물들 빈자리가 없다. 그러니 끝까지, 나영규는 김장우를 모르고 김장우도 나영규를 몰랐다. 삶의 열기로 아스팔트를 끈적하게 녹이듯 살아가는 안진진 곁에 산기슭에서나 자라는 라일락이 있을 리 없고, 숨어들 듯 뿌리에 힘을 주는 연약한 들꽃이 버틸 리 없다.


이모는 직접 뿌리 내리지 못한 인간으로, 수생식물처럼 산다. 이모의 용기 없음은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인물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온화한 공간에서 자라는 수생식물은 바깥에서 물을 갈아주거나 보충해주는 이가 없으면 아름다움을 간직하지 못한다. 정처 없이 자유롭게 노닐 것 같은 뿌리인데도 지정된 공간을 떠나면 뒤따르는 것은 죽음이다. 떠날 수 없는 이모는, 스스로가 무덤 속처럼 살았다지만 그보다는 생생한 현장을 관 안에 가두고 살았다. 이모의 침실은 관짝이다. 그 속에는 창조하는 감각은 없고 소비하는 감각만이 있으며, 대중의 욕망을 제 것으로 만들지도 못하는 비겁함이 축축하게 바닥에 깔렸다. 생경한 장면을 고대하며 일상을 생경하게 만들려고 어리숙함을 미덕으로 삼은 삶이다. 요구할 줄 모르고 경탄만 일삼는 이모는 찬미할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는 일상을 무료하게 보내는 법만을 안다. 이모의 삶은 진정한 놀람이 없어서 작위로 꾸며진 일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모부와 닮았다. 이모부의 사랑이 소위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인지 알 길은 없다만, 어쩌면 이모부의 사랑도 사랑인지라 이모의 위장을 모른 체해온 걸지도 모른다. 둘을 이어주는 것은 무지다. 무지를 가면 삼아 춤추고 무도회가 영원히 지속되길 꿈꾸면서 조명을 끄지 않는 삶이었다. 장갑 낀 손에 화려한 반지를 끼우며 맨손을 절대 보지 않으려하는 이모부와 면사포 아래 민낯을 숨기려는 이모, 두 사람이 버리지 못한 사랑의 자존심.


가끔 그 틈으로 산산조각 난 접시에 날카롭게 깨진 언니의 일상이 바늘처럼 이모를 찔렀다. 이모는 언니의 불행이 옷감에 감춰진 피부를 찌를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달가워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모순적 인간으로 살았다. 이모는 무딘 감각을 자극해보고자 과장하며 쉽게 “영원히 간직할 거야”라고 내뱉었다가, 무던해지다 못해 알아차리기도 힘들어진 자신의 불행을 부풀려 관짝을 부수며 영원히 잠들 듯 죽음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척박한 땅에 강제로 내려진 뿌리를 붙들고 구황작물처럼 산다. 구황작물 중에서도 근채류에 속하는 흙으로 덮인 삶이라 이모처럼 둔감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땅을 헤집는 매서운 소나기에 비견할 정도의 불행만이 어머니의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으킨다. 어머니는 책을 비료삼아 양분을 보충하면서 아버지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보려고도 하고, 준모의 형벌을 덜고자 하며, 일본인을 고객 삼아 일을 벌이려고 애쓰기도 한다. 불행으로 다져진 땅이 단단해질수록 어머니의 감각은 더욱 둔해졌다.


어머니와 이모는 겨우 10분 차이로 태어났으면서도 10년 차이로 다르게 늙어갔지만, 역시 그들은 서로를 분간하기 어려운 쌍둥이였던 것이다. 아무리 다른 듯 보여도 맨몸으로 자기답게 살지 못한 생이라는 데서 똑, 닮았다.


모순은 창과 방패처럼 두 가지만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샛길을 허락지 않는 옹졸한 상상력을 낳는다. 이것이야말로, 그러니까 오직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 완강한 갈림길이야말로, 삶을 지리멸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틈을 비집고 가서 안진진은, 비튼다. 삶에서, 수생식물과 구황작물의 삶이 전부일리 없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에는 모순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삶에서 모순을 찾는다지만 영원한 삶이 없는데 죽음이 있다한들 그것이 어떻게 모순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영원을 노래하는 사랑이 허망함을 끝 삼아 잦아들어도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노래에도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혹여 그 노래가 영원히 재생된다한들 그것은 하나의 곡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는 꼬리물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니 안진진의 맹랑하고 명랑한 에피소드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데일 줄 알면서도 불에 다가서는 용맹함에 위안을 얻는다. 그의 말처럼 나도 소의 귀를 가졌다. 우이독경. 소의 귀를 가진 사람들은 실수인 줄 알면서도 또 실수를 저지르고 우직하게 길을 낸다. 갈림길이 무색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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