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명관,『고래』를 읽고
어설프게 현실을 모방하는 소설은 졸작이란 혹평을 면하기 어렵다. 자전적 소설이어도 사실이라고 보기엔 현실의 법칙성에 어긋나야 비로소 삶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천명관의 『고래』는 이 법칙에 충실하다. 이것은 소설의 법칙이라 하겠다.
화자는 특정한 법칙을 언급하며 작중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이 필연적 귀결에 가까운 우연임을 알린다. 온갖 법칙에 따라 자연히 일어남 직하지만 정작 죄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기적’ 같은 이야기뿐이다. 이것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독자는 『고래』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작업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남성 작가의 뻔하고 천박한 상상력이라는 지루하고 얄팍한 투덜거림이나 입에 담는 것으로 감상을 마치게 될 것이다. 주요 인물이 모두 여성이면서 그들의 성적 방종과 성폭력을 다루는 것이 안일하다고 평하는 순간, 작중 남성이 모두 숙고할 능력조차 없는 몸뚱아리로 그려지고 있음을 놓칠 수밖에 없다.
『고래』는 춘희에서 시작하고 노파와 애꾸눈을 거쳐 금복에게 이르지만 우리는 금복에서 시작하자. 금복은 흥미로운 냄새에 이끌려 홀린 듯 유랑하다 근원을 발견하는 대신 근간을 세우는 인물이다. 금복은 ‘묘한 냄새’를 풍기며 사내를 유인하고 그들을 이용하여 문명을 건설한다. 후각적 자극은 분명한 근원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더욱 유혹적이다. 후각적 유혹은 행위를 촉발한다. 금복이 생선장수의 비린내에 홀려 고향을 떠나게 만든 것처럼, 사내들은 금복의 묘한 냄새에 이끌려 이성이 제거된 분출하는 폭력으로 돌변한다. 금복의 묘한 냄새 이면에는 생의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에 따라 남성의 몸은 노동하는 힘이 된다. 생의 의지를 실현하게 만들지 못하면 남성은 사물조차 될 수 없다. 생선 장수는 금복을 만나 목돈을 쥐었으나 쓰일 가치가 없어 금세 버림받았고, 걱정 또한 쓸모없는 육중한 육체를 스스로 단죄했으며, 칼잡이는 감히 금복을 가두려한 죄로 뜻밖의 죽음을 맞이했다.
걱정과 칼잡이의 죽음으로 제의를 마친 금복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쟁을 거쳐 폐허로 돌아가 문명을 낳을 어머니가 될 준비를 마친다. 진원지를 알기 어려운 냄새처럼, 금복은 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본능에 충실히 움직인다. 이것이 금복의 생애 전반에 적용되는 ‘본능의 법칙’이라 하겠다.
이제 모든 기획은 금복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때 “이루어진다”고 함이 옳다. 금복은 본능적인 기민한 감각을 따르고 타인으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지시하지만 그 기획은 다분히 야성적이다. 그것은 이익과 손해를 따진 예견된 기획이 아니라 육체적 반응에 가깝다. 금복의 분냄새가 닿은 곳에 조악한 문명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버려진 늪지대는 훌륭한 벽돌이 탄생할 흙을 품은 기회의 땅이자 ‘평대벽와’로, 국밥집은 세련된 향미를 풍기는 ‘평대다방’으로, 다방은 철길이 인도한 쌍둥이 자매와 코끼리 점보가 오면서 이국적 색채를 덧입자 사람들을 끌어 모았으며, 덕분에 볼품없는 삼륜차는 사륜차가 되고 ‘평대운수’로 거듭나고, 은밀한 욕망으로 육체에 굴복한 거짓된 신실함이 교회까지 세웠으며, 성과 속이 한자리에 모이자 추동하는 힘을 탐낸 권력자의 발길마저 닿았으며, 문명을 건설한 금복을 기리는, 그의 힘을 닮은 고래극장으로 평대벽와에서 출발한 평대 도시문명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금복이 세운 문명은 폐허로 돌아갈 예비로써, 금복을 남자로 손질한다. 금복은 수련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육체를 탐하고, 만들어진 욕망을 제 것인 양 흉내내며 껍데기만 남아 영화처럼 산다. 금복이 처음에 현실과 영화를 혼동했던 것처럼, 금복은 죽은 이들의 환영을 현실과 분간하지 못하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에 의해 불 속으로 사라진다. 금복이 새롭게 태어날 때는 언제나 죽음이 있다. 항구를 떠날 때는 걱정과 칼잡이가 죽었고, 채비할 땐 노파의 죽음에서 득을 보았으며, 남자로 태어나 그로 죽을 때엔 극장을 방문한 이들이 함께 죽었다. 문명을 세우는 건설자로서의 금복이 탄생할 땐 어땠느냐고? 그것은 생명의 힘이다. 춘희를 떠올리시라. 춘희가 가진 자연의 힘 덕분에 ‘최초의 교통사고’로 점보가 죽는 것으로 마쳤다. 그의 힘이 아니었다면 춘희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다만, 금복이 그 죽음을 조롱하듯 생을 연출한 탓에 화마가 닥쳤을 뿐. 이 화마를 이끈 이가 춘희라는 데에 주목하자. 산 것은 죽기 마련이고,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 법칙에 어긋난 세상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진정한 자연, 아니겠는가. 죽은 것이 산 것을 모방하면 그 흔적도 남을 가치가 없다. 그러니 죽었으면서 산 척하는 것들은 사라져야 함이 옳다. 화마가 찾은 자리는 살아있는 척하는 죽음이 도사리는 공간이다. 자연의 힘이 없는 인위적 문명이 생명인 척 자생하려고 꿈틀거리는 곳.
금복은 고래극장을 세우면서 고래를 죽였다. 점보를 박제하면서 그가 생명일 수 있었던 모든 순간을 박탈했던 것처럼. 금복에게 또렷했던 것은 고래 자체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바다 내음과 비릿함이 뒤섞인, 너울거리는 파도로 형상을 명료하게 인지할 수 없는 공감각적 이미지였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로 가득한 미지의 세상이 고래가 사는 바다 아니었던가. 바다를 가질 수 없는 인간은 스크린에 바다를 가두었고, 고래를 얻을 수 없는 금복은 건축술로 고래를 박제했다. 결국 바다를 육지에 가두어 고래를 박제하려던 자는 둔감해진 탓에 기름 냄새를 맡지 못하고 굼뜬 손놀림으로 불을 켜 화마를 개시하는 자가 되었다.
금복의 돌변함은 그의 기획과 달리 예견된 것이었다. 작중에서 성적 욕망은 촉각이 아니라 후각에 집중하여 전달된다. 후각은 흥미를 일으키고, 촉각은 문명을 건설하는 노동하는 힘을 낳았다. 하지만 금복이 영화를 보면서부터 생동감 있는 후각과 촉각이 둔감해진다. 시각은 성과에 탄복하게 만들고 청각은 타락의 길로 인도한다. 후각과 촉각은 인간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지만 시각과 청각은 그 자리에 머물러 감상하게 만든다. 인간의 손과 발은 도구로서의 가치를 잃어간다. 칼잡이가 왜 손가락을 잘랐을까? 칼잡이는 왜 그곳에서 떠나지 않았을까? 그는 더 이상 제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라 기물로서의 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금복은 극장을 세우면서 성적 충동을 잃고 ‘자본주의의 법칙’에 따라 그 또한 단순한 말이 되어간다. 금복을 뜨거운 인간으로 만들던 열정은 사그라지고 탐욕에 집착하는 아귀 같은 남자만 남는다. 급변하고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는 보는 이를 사로잡아 그가 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 행할 힘을 잃은 자는 영화를 유지할 수 없다. 이것이 ‘영화(映畫) 같은 영화(榮華)의 법칙’이다.
힘의 논리에 굴복하는 인물들은 체념에 익숙하다. 강한 육체에 굴종하듯 몸을 팔기 위해 따라온 여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힘을 과시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멍청하다. 걱정의 타격으로 성불구가 된 사내 또한 그 일에 그러려니 하며, 불시에 작살에 찔린 칼잡이도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금복은 강한 힘이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할 때 그러려니, 하면서도 그 수고로움의 보수를 스스로 정한다는 점에서 그러려니, 하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지 않는 인물들은 그 대가를 치른다. 생식이 용인될 수 없는 노파는 왕성한 생식력을 지닌 반편이를 탐했다. 노파는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그러려니, 하지 않았다. 힘이 약한 여성은 성애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난 뒤에라야 욕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법칙”을 어긴 노파는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 못생긴 얼굴을 가린 벌거벗은 몸은 드디어 ‘몸뚱이’로서 여자일 수 있는바, 이에 느낀 욕정에 자존심이 상한 남자들은 더욱 거세게 매를 들었다. 노파는 이 대가마저도 그러려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반편이를 데리고 물로 들어가 앙갚음하고, 또 앙갚음을 다짐한다. 그리고 그러려니, 하지 않고 힘의 논리를 거스르고 행위하는 인간으로 살던 금복이 어느 순간 그러려니, 하기 시작하자 그의 앞에 나타난다. 불합리한 힘의 논리에 이끌려가는 인간에게 영화는 과분하다. 가상(嘉賞)할 수 없는 가상(假想)인 셈이다.
들을 수 없는 춘희와 볼 수 없는 文만이 시각과 청각의 폭력적 자극에 굴복하지 않는다. 춘희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점보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고, 文은 시야가 흐려진 뒤에야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금복을 비롯한 다양한 작중인물은 우리 흔히 인간다운 면모라고 이르는 실존적 고민도, 성찰도 하지 않는다. 춘희와 文만이 삶 속에서 죽음을 바로보고 죽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을 느끼고 죽음을 슬퍼하며 그리움을 추억한다. 우리는 춘희와 文에게서 인간으로서 우리를 발견한다. 눈을 감거나 귀를 막을 때, 인간은 폐허에서 벗어나 지구 바깥으로 간다.
어린 춘희는 금복의 분냄새에서 그녀를 신기루처럼 떠올렸다. 금복은 연명을 위한 식(食)의 세계에서 번영하는 주(住)의 세계로 갔다.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다자란 춘희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욕망을 품은 자도 아닌, 누군가도 아닌 무언가로 살아갔다. 춘희야말로 순수하다. 춘희는 세속의 영역을 벗어난 성스럽고 폭력적인 짐승이다. 춘희에겐 도덕이 없고, 힘의 논리도 무용해진다. 춘희가 대장간의 모루를 어루만지며 철에 관심을 가지고 유일무이한 벽돌을 만들어낼 때 독자는 희망을 품었다. 언어를 버리고 감각만으로 건설하는 문명은 어떠할까? 문자가 없는 문명은 이룩된 적이 없고, 춘희는 문명은커녕 제 집도 짓지 못한 채 메마른 노파의 육신으로 죽는다. 어쩌면 죽지 않는 것은, 제 뜻과 무관하게 기둥에 묶인 채 야생에서도, 마을에서도 살 수 없는 개 한 마리. 아니, 죽을 수 없는 것은.
영화를 이룬 인간은 하나같이 미식을 취미로 삼지만 이야기 속 인간들은 미각의 즐거움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들에게 미각이 없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먹는 재미로 사는 인간은 이야기 속엔 없다. 음식은 온전히 입속에 담아야 맛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식 향유는 통제하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 취미이다. 온갖 법칙이 다스리는 이야기 속에서 수동적으로 휩쓸리는 존재는 알아낼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코끼리 점보(비록 춘희의 환상에 불과할지 몰라도)만이 아프리카 가시나무 잎사귀의 훌륭한 맛을 기억한다.
자, 이쯤에서 금복의 이야기를 마치고 모두의 이야기도 마치자.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인만큼, 우리는 끝없이 떠들 수 있을 테니까. 서양인의 얼굴을 한 장군 신을 모시는 무당이 남긴 말을 두고 학술적 논쟁을 주고받다 욕설로 끝나며 젠체하는 이들이나, 감방의 법칙하에 일그러진 얼굴로 인위적인 고통을 주고받는 죄수와 간수들이나, 뒤늦게 나타나 제 욕구만 채우고 무책임하게 죽어간 춘희의 남자나, 반쪽짜리로 세속과 성역의 경계에서 죽은 듯 사는 애꾸눈이나, 고고한 건축물을 연구하고 세우고자 잊힌 평대를 끝내 발굴한 건축가와 그 제자들이나, 아니면 또…….
소설 『고래』는 결코 있을법하지 않은 사건이나 인물이 소재로 등장하면서 역설적으로 현실을 들춘다. 작중인물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묘사되고, 이들을 독자 자신 또는 독자가 접하는 인간과 다른 존재로 낯설게 인식하게끔 유도하지만 그럴수록 인물들은 현실 속 누군가와 중첩된다. 바다는 생명을 품은 파멸의 힘이고, 성스러운 폭력이 깃든 금단의 영역이다. 그러니 바다는 저 멀리 있고, 나는 이곳에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