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승우, 『나는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를 읽고
터져 나온 말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더니 천장에서 무너지듯 떨어지며 바닥을 울렸다. 두셋도 아닌 아홉 사람이 한꺼번에 소리를 내니 요란했다. 야단스런 분위기를 바꾸고자 나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합죽이가 됩시다, 합죽이, 합!”
순간 눈이 동그래진 틈에서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합죽이’는 장애인 비하하는 나쁜 말인데요!”
그렇게 나는 장애인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선생님이 되었다.
이렇게 말이 어렵다. 기민하게 시대를 따라간다 자신하면서, ‘MZ세대’를 말하는 최연장자인 밀레니얼들이 꼰대티를 벗지 못해 젊은 녀석들과 묶이려고 한다고 비아냥대기만 하더니 나 또한 꼰대 되시겠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말에 아래와 같이 응수했기 때문이다.
“나 때는 안 그랬어!”
가끔은, 꼰대가 대놓고 꼰대다워도 괜찮다. 시간이 흐르면서 절로 삶의 장면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 나이 먹는 것만으로 대단할 게 없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일랑 남기 마련이니 나보다 아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홍승우의 『나는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그간 무신경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TMI’를 농 삼아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학생에게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아요. 계속 그러면 우리 집 강아지 똥 싼 얘기를 들려줄 겁니다”라고 받아치거나, 흰 머리가 부쩍 늘어서 다 뽑으면 대머리가 될지 모른다며 그러면 “자라나라 머리머리”라고 외칠 거라고 장난치거나,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던 일이 떠올랐다. 막장. 더는 갈 곳이 없는 어두운 굴에서 드디어 나간다고 기뻐해야할지 몰랐을 숨 막히는 공간이 엄습했다. 나는 막장에 그런 뜻이 있는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꼰대라는 말이 온라인 공간에서 유행했으며 그 대상은 주로 직장 상사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몇몇 표현은 썩 나쁘지만은 않다. 사실 저자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표현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해학을 담아낸 것이 대부분이고 면박주기보다는 에둘러 상대를 모욕하지 않으려는 마음씀씀이가 담긴 말이 여럿이다. “갈아 넣었다”는 말은 자기 공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봉사하도록 요구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깨고 각자의 노력을 현시하는 말이고, “흙수저”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임을 환기하여 기존 세태의 “노오력”을 걷어차는 말이며, “등골 브레이커”는 ‘우골탑’이 미화될 수 없음을 보여주며 부모 세대의 맹목적 희생을 당연시하는 가치관을 뒤집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PTSD”라는 전문용어가 유행어로 자리하자 개인의 트라우마는 ‘나약한 정신력’이라는 선입견을 밀어내고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관종”이란 단어는 타인의 돌발행동을 이해하려는 단초를 제공하면서(‘비정상인’이라고 낙인 찍는 대신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 ‘관심 주지 마세요’와 같은 반응을 끌어냄과 동시에 관심 받고자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서 꼰대 정도야, 귀엽게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 영향을 비추며 과도한 우려라고 일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문제는 재고되어야 하는 단어가 놀이인지 폭력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힘겨루기를 함의한 표현이라는 데에 있다. ‘듣보’를 예로 들어보자. ‘듣보’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면서 자기 권위를 내세우는 권위주의자를 비트는 말로 쓰이곤 했다. 당신이 그리 잘났다고 말하는데, 나는 당신을 듣지도 본 적도 못했다는 말이다. 사실 여기엔 ‘잡놈’이라는 뜻이 하나 더 붙어서 ‘듣보잡’으로 쓰이는 일이 많았고, 그 말이 싫었던 변 모씨는 그 말을 한 진 모씨를 고소했으며, 이 일로 ‘듣보잡’이 유리한 누군가가 아니라 불리한 누군가를 향하는 말임이 명확해졌다. 더불어, 한번쯤 듣거나 보았어야 할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의 상품화된 위치를 명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니 연예인을 두고 ‘듣보’라고 말하면 그게 곧 모욕이 된다(법적으로 죄가 성립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물음표 살인마’도 마찬가지다. 관련 일화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저자처럼 안쓰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물음표 살인마는 태만을 순수로 치장한 자칭 선량한 사람들이다. 다만 면전에다 “직접 찾아보는 방법을 모르는 거냐, 아니면 남 시키려는 거냐? 멍청한 놈이냐, 나쁜 놈이냐? 멍청한 놈도 나쁜 놈이다”라고 말하기엔 그 말을 하는 자기도 나쁜 놈이 되니까, 제 딴엔 배려한답시고 ‘물음표 살인마’라고 하거나 ‘핑거 프린세스(프린스)’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실제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할 위험을 외면할 순 없기 때문에 역시 ‘유우-머’가 되기엔 부적합하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꼰대는 꼰대다. “관종”을 말하면서 “어텐션 호어”를 굳이 예로 언급하는 그 무신경함과(‘호어’가 어떤 뜻인지 몰랐다면 그게 더 문제다), 잘하지 못하면 힐난하는 사회에서 자칭 ‘-린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를 ‘어린이는 미숙하다는 오만’으로 압축하는 고압적인 시선이 싫다. 나도 저자와 같이, 문제시 된 표현이 대개 자조적 맥락에서 쓰이는 탓에 희망보다는 불행과 절망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이 아쉽다. 다만 나는 아직 꼰대와 안 꼰대의 경계에 있는지라(아마도), ‘흙수저’와 같은 계급론을 말하는 이들의 ‘삶을 불행하게 여기는 시선’을 탓하기보다는 역시, 프롤레타리아 혁명까진 아니어도 모종의 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따름이다. 게다가 ‘노가다’나 ‘막장’과 같이 남성이 주로 종사했던 직업군을 폄하하는 표현은 행위의 특성만이 남아 성별과 무관한 맥락에서 회자되는 데에 반해, ‘조무사’와 같이 여성이 대부분이었던 직업군은 보조적 역할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대상의 인격을 폄하하는 의미에서 쓰인다는 차별을 뭉뚱그리는 태만함도 싫다. ‘노가다’나 ‘막장’은 자신 또는 타인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자조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조무사’는 어떤 맥락에서도 모욕으로 기능한다. 더불어, ‘박제’라는 말의 무식함을 말하면서 ‘반려동물’을 이상화한 표현으로 제시하는 지적 깊이도 싫다. 엄밀한 의미에서 따지면, 가정에서 돌보는 동물은 인간의 폭력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반려(伴侶)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반려(返戾)의 위험 아래 취약하게 살아가야 한다. ‘반려동물’로 살아가는 동물에게 붙은 애칭이 동시에 그의 본능적 습성을 억압하는 멸칭인 것처럼.
진짜 문제되는 표현은 유행어에 있는 게 아니라 무신경하게 스치는 온갖 장소에 있다. ‘노약자’라는 표현이 문제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 말 하나로, 노인은 약하므로 은퇴가 최선인 돌봄의 대상이 되며 노인이 아닌 다른 약자는 배려의 후순위가 된다. 노인이 약하다는 인상을 강화할수록 사람들은 나이 듦에 겁먹고 늙음을 내쫓으려 한다. 인간 이외 동물에게 이름은 실상 멸칭과 기만이겠으나, 인간이란 동물에게 이름은 개인으로 현현하여 숨 쉬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필요조건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가치를 만들며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노약자’보다는 ‘노인’이어야겠고, ‘노인’이라기보다는 ‘사람’이어야겠다.
저자의 가장 큰 오독은 “약 빨았다”를 비상함의 다른 표현으로 본 것이다. 우리는 비상한 것을 보고 “약 빨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멀쩡한 정신으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작품의 개성이나 완성도 등이 기존의 기준으로 평가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자신을 착취하지 않으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일탈하듯 만든 작품이 사장되지 않길 바라며 쓰는 우스갯소리이다. 고급문화를 구분하고 대중예술을 ‘딴따라’라고 폄하하던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비주류에 속하는 문화의 맥을 이어가려는 몸부림이자, 저급하다 평가받을까봐 숨겼던 자신의 취향을 세상밖에 드러내는 울림이다. 그 시작은 9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엽기’였고, 나름의 성숙을 거쳐 ‘약 빨’고 만든 컨텐츠로 이어졌다. 최근 개봉한 영화 <가문의 영광 리턴즈>가 대놓고 ‘약 빨’고 만든 작품의 예시 중 하나겠다. 확실히 약 빨고 만든 영화 같은데, 비상하진 않다.
나는 책에서 다루는 표현 문제를 접할 때면 조나단이라는 방송인이 떠오른다. 그는 어릴 때 콩고에서 한국으로 망명했고, 쭉 한국에서 자랐다. 조나단은 ‘암살개그’로 유명해졌다. 인종차별적 표현을 쓰지 않으려는 친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오히려 소통을 어렵게 만들자, 조나단은 ‘암살개그’를 시도했다.
조나단: “조나단은 어떤 친구인지 말해주세요.”
친구: “밝은 친구입니다, 밝은 친구.”
조나단: “아, 밝아요? 원래 어두운 줄 알았어요?”
친구: (당황하며) “아뇨.. 아뇨, 아뇨!!”
조나단: “근묵자흑. 이거 알아요, 이 뜻?”
친구: “몰라요.”
조나단: “검은 것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
친구: (당황하여 답을 못 함)
조나단: “이 뜻, 공감한다는 거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기를 돌아보는 엄격한 검열이 아니라 웃음이다. 한때는 그것이 유쾌한 웃음을 안겼는데, 이제 웃기지 않으니 쓰지 말자고 독려하면 그만일 일이다. 심심하던 차에 EBS의 <위대한 수업> 중 댄 에리얼리의 <돈의 심리학>을 보는데, 이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이 불편했던 것은 시종일관 “실수해도 나쁜 건 나쁜 거야”라고 꾸짖어서 그랬다. 댄 에리얼리는 자신의 연구를 언급하며 성장하는 회사는 “실패해도 처벌이 없는 회사”라고 말했다. 실수나 실패에 관대한 공간은 시도를 성원하고 도전을 격려한다. 실수여도 그 말은 부적절하니 다른 말을 쓰자고 웃으면서 권하는 너그러운 “꼰대”가 많아지면 좋겠다. 나는 아직 철부지이고 싶으니까. 진짜 꼰대나 아직은 안 꼰대인 나나 피차 철부지이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늙을수록 애 같아진다는데, 애처럼 깔깔 웃고 “다음엔 그러지 말자!”라고 손잡아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