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혜,『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몰라서 그랬다는 말만큼, 달콤한 변명은 없는 듯하다. 악의가 없었음을 내비치면서 선의를 가장할 수 있는 말. “나 때는 그랬다”라거나 “어떻게 다 알겠어”와 같이, 누군가에게 향하는 규범적 기대가 합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전제에 호소하지만, 정작 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입지는 언제나 유리했다. 합리적 기대에 어긋나는 요구는 과도하니까, 그 변명을 듣는 불리한 위치의 사람들은 이해하는 척 불합리한 상황을 외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호한 표현에 뒤따를 법한 ‘당신은 차별했다’는 말이, 상대를 주제넘게 단죄하는 행위로 오도되어 ‘괘씸하다’는 평에 따라 또 다른 불합리한 상황을 직면할까 무서워서 차라리 ‘비겁함’을 덕목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숱하게 들어온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길 택할 때, 저자는 과감히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표현으로 무지가 면책될 수 없음을 단언한다.
저자의 비판이 일견 그럴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다양한 차별을 일깨우고,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착각까지 한다는 현상을 비추는 시선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남성연대를 이끌면서 역차별받는 시대의 남성들의 힘듦을 말할 때, 그 말이 우습게 들리는 것은 미약한 정신의 힘이 단편적인 현장을 사회 전반의 모습으로 오인하는 데서 비롯된다. 한 계층 또는 계급 내에서 남성은 언제나 유리했고, 여성은 약자로 규정되고 차별받았다. 그러니까 “숨통을 조이는 닭장에서 버는 한두 달 봉급을 여자의 가슴에 꽂아주”면서(“솔아솔아 푸르른 솔아” 가사 중 일부) 권위 있는 남성의 이미지를 답습하고 여성을 타자화한다. 그러니까 힙합문화에서 ‘아티스트’들은 “나는 전희 없이도 삽입할 수 있지” 따위의 말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그 맥락 내에서 여성은 성스러운 어머니 또는 저급한 창녀로 이분화된다. 능력주의 신화를 맹신하며 “좋은 학벌을 비롯한 다양한 스펙”은 그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유리한 물질적, 지적 자산을 제공하지 못하는 부모를 원망하며 ‘수저 타령’을 반복한다.
그러나 ‘차별은 나쁘다’는 당위 아래 특정 행위를 평가할 때, 정말로 그를 ‘가해자’로 규정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의식적으로든 은연중이든, 차별하는 사람들이 ‘차별은 나쁘다’는 명제를 부인할 것 같지는 않고, 이는 그의 특정 행동으로 미루어 상대를 ‘차별주의자’로 정체화하는 판단이 합당한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예맨 난민에 대한 반감이 한국에서 우세했던 이면에는 여성들의 공포가 있었다. 2015년 이전에 성범죄는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이주노동자가 저지른 범법행위 또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에게 익명으로 다가오는 공포는 미지의 것이기에 예측할 수 없고, 그렇다면 그 공포가 발 디딜 수 없도록 분노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성중립화장실을 논할 때 실제 여성들의 공포 또한 ‘차별주의자’의 혐오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낙인이 뒤따른다. 남성 일반에게 기대되는 그릇된 성역할의 차별적 기능을 비판하는 이들은 ‘여성혐오자’가 되거나 ‘정치적으로 그른’ 이로 식별된다. 이러한 단편적 시선은 이견을 제시하는 집단을 단지 수적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자를 억압하는 집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억울함’을 낳고 갈등을 부추긴다.
그런데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표현이 귀속될 법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 표현은 어딘가 무책임하고, 심지어 모종의 폭력을 방기하는 느낌마저 준다. 고학력 고소득직종의 여성이 저학력 저소득층의 남성 앞에서 ‘성차별’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울까.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의 구애를 거절하는 것이 곧 자신을 ‘차별주의자’로 낙인찍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레즈비언의 입장에서, 사회에서 ‘이성애자’로 살며 ‘정상성’ 내에 포섭되는 인물의 주장이 어떻게 와닿을까.
여태 살면서, 부당한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특정 정치적 입장을 강경하게 표명하는 이들이 대개 그럴싸한 학벌에 수도권 거주자라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도 좀더 단순하게 볼 수 있었다면, 그렇게 단순하게 ‘평등’을 말할 수 있었겠다. 차라리 ‘선량’했으면 좋겠다. 당신의 삶에는 차별의 현장이나 몇몇 우범지역에서 보낼 시간이 많지 않다. 아늑한 자리에서 논하는 ‘평등’이야말로 얼마나 달콤한가. 피부로 느낀 낯섦 앞에서도 당신은 덤덤하게 ‘평등’을 말할 수 있을까. 그간 보아온 무수한 얼굴이 독서하는 내내 스치거나 머물렀다. 낯선 이방인을 기꺼이 미소로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이방인이 모여 거주하는 공간의 예측불가능에서 멀리 거주한다.
나는 항상 궁금하다. ‘그래도 남자도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그 아늑한 공간도, ‘그래도 학벌주의는 나빠요’라고 말하는 나의 아늑한 공간도 모두 위선적이다. 물론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아 악의를 숨기지 않는 것보다야 위선이 낫겠다. 그러나 나도 결국 말을 덧붙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피해자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는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은 판단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논증과 설득은 다르다. 논증은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주장과 함께 제시되면서 참된 명제를 결론으로서 보이는 것이 그 목적이지만, 설득은 설득하는 자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믿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논증이 아닌 설득만이 있으며, 거칠게 말하자면 그의 주장을 위해 수단화된 사유가 배치된 글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전제 하에 독자를 설득하며 때때로 독자의 불편함을 끌어내거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를 일갈한다. 아마도 저자는 “당신이 참이라고 믿는 것”과 “객관적 참으로서의 규범”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결국 나는, 또 삐뚤어진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설득이면서 논증인 척하는 글을 읽기란 도통 무던히 반복해도 무뎌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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