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지웅, 『최소한의 이웃』을 읽고
삶은 문득 허망하게 다가옵니다. 희망찬 다짐으로 내일을 욕심냈다가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며 스러지는 생의 절규 앞에서 힘준 어깨를 움츠리고 맙니다. 죽음은 소나기처럼 찾아오는 것이라 우산을 챙기며 단단히 준비할 땐 비껴가고, 겨우 한숨 돌리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무심한 듯 들이닥칩니다. 그러니까, “힘내”라는 말을 해볼까 고민하다가도 다그치듯 바닥에 내리꽂히는 빗금에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치들고선 여전히 맑은 하늘에 자못 상심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하려던 “힘내”는 명줄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따가운 햇살은 젖은 바닥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생사의 경계를 목도하고도 속세로 돌아왔으니 생생한 고통보다는 어렴풋한 평온을 이불삼아 살아야겠지요. 도보 귀퉁이 어딘가에 짓이겨진 이끼로 남아 누군가를 미끄러뜨리기보다는 그편이 낫습니다. 그러니 나도 이 글에서는 삐딱한 자세를 고쳐 앉고, 당신이 지면을 통해 전하는 “힘내”라는 응원에 화답을 준비해봅니다. “머리 긁는 소리가 벽 긁는 소리처럼 들리는” 고시원에서 지낸 것이 어딘가 비슷하고, 만화책 따위를 읽으며 “사유”를 운운하는 것도 퍽 닮았다싶습니다. 저는 제육볶음을 내어주는 어른을 만나진 못했지만 늙은호박전을 처음 맛보게 해준 어른은 만났으니, 평행선처럼 자기주장만할 것 같던 옹졸한 삶에 변곡점이 생긴 것도. 그래, 당신의 삶은 각자 자기만의 사연을 짊어지고 사는 아무개의 삶과 접점이 있습니다. 나도 그 아무개 중 하나겠습니다.
애정, 상식, 공존, 반추, 성찰, 사유. 하나의 단어로 이름 붙인 각 장에서 짧은 호흡으로 힘을 불어서 단어가 더욱 또렷하게 와닿는 면면. 진부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말. 그래도 정말로 진부할 수는 없어서, 올바름을 말하며 ‘불편함’을 표현하는 이들에게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대신 택한 ‘지구2’ 이야기.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낼 용기를 북돋고 아무개가 직접 쓰는 이야기를 기다리며 이무기가 아니라 용이라고 말할 준비를 마친 온점. 쏟아지는 조소가 선하게 그려져도 어쨌든 펜을 들겠다는 고집.
아무개로서, 그래, 그래도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용하고 강인한 평정 안에서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며 나를 살뜰히 돌보되 문을 열고 ‘절망의 겨울’을 보내고 ‘희망의 봄’을 맞이하는 거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기보단 “그래, 사람들 반성해야 해”라고 말하겠지요. 선량하기 그지없는 “최소한의 이웃”들이. 무해한 듯 문 두드리며 나의 공간을 침식하고, 허락을 구하는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들을 기다림은 제 몫이 아니라는 듯 자비를 가장하는 이웃들이. 그들이야말로 당신의 책을 읽고 사랑과 평화를 말하며 무채색으로 생기 잃은 세상에 온기를 더한다고 말할 텐데. 그러면 나는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또 다른 라이카가 되어 “반가워요 여러분, 저는 아무개예요. 이 여정은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절 잊지 말아주세요 여러분. 저는 아무개예요. 언젠가 별 조각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갈 거예요.”라는 무용한 인사만 겨우 남기고 추방당할지 몰라요. 시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부탁 따위나 남기는 염치없는 인간일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말은 명쾌하지만 무해함을 자만하는 이들의 유해함 앞에서 때론 무력해져요. 당신은 너무 멀리 있고, 나의 지독하도록 선한 이웃은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그래도 “힘내”라는 말이 전하는 응원은 굳건할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내 곁에서 이웃 찾기를 멈추고 외딴섬에서 보낼, 또는 지구 밖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전송하는 미미한 신호에 안테나를 맞출게요. 어리석다고 이웃을 탓하는 대신 그에게 우산을 씌워주려면, 매서운 가면을 쓴 이들에게서 나의 우산을 지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표하며 기껏해야 미간을 찌푸리는 목격자가 아니라 절절히 아파하며 공감하는 인간으로 살려면, 위성 궤도까지 도달하는 길은 너무 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