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을 읽고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이었는데"
콰지모도는 클로드를 죽이고 한 마디 내뱉는다. "되다만 것"으로 살면서 추한 외모 탓에 광인절의 교황으로 '추대'받으며 얻은 관심에 어쩔 줄을 모르던 삶. 클로드는 자신의 동생에게 자비가 닿길 바라며 콰지모도를 거두었다. 어쩌면 콰지모도는 처음부터 모종의 역할을 위해 삶의 기회를 얻었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귀가 더욱 멀 것을 알면서도, 더욱 귀가 어두워지길 바라면서 종을 쳤을 것이다. 가장 추하고 천한 존재로 성스러운 노트르담의 종지기로 살아야하는 삶에 더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클로드의 악행을 거들면서 살지만, 그마저 감사한 마음으로, 클로드를 '사랑'했던 콰지모도.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모습을 보며 클로드가 웃자 콰지모도는 그를 밀어버린다. 콰지모도가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존재가 타락했음을 외면해왔으나 결국 직면했기에 환멸을 떨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나를 살게 한 인물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결정은 숙고라기보다는 즉각적 반응의 결과에 가깝다. 모두가 다가오기를 꺼리는 순간에도 연민 하나로 자신을 인간으로 대한 에스메랄다가 없었더라면, 콰지모도는 '사랑한 모든 것'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 파리라면, 무지하고 폭력적인 대중은 자신들의 괴물같은 모습을 감춘 채 콰지모도를 '괴물'이라며 벌했을테니까. 괴물이 무서운 '괴물'은 신성한 장소에 몸을 숨기고 진정 파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성물로 거듭났을테니까.
콰지모도를 기른 클로드는 젊은 시절부터 도피하듯 학문에 몰두한 인물이다. 페스트로 부모를 잃고 동생을 성심껏 돌보며 살고자 했으나 동생은 클로드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클로드는 남몰래 연금술을 연구하고, 금을 만드는 데에 성공하면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문명을 세우는 권력자가 되리라는 강력한 세속적 욕망을 품는다. 절제하며 검소하게 살았으나 그 삶이 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에스메랄다를 우연히 마주친 것만으로도 임계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겨우 억눌렀지만 에스메랄다를 본 순간 이루고픈 욕망이 분출했고, 이를 통제하기 어려웠던 클로드는 모든 화살을 에스메랄다에게로 돌린다. 그는 연금술에 성공하면 에스메랄다를 '취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성직자를 그만두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부유하게 살아가는 일상이 탐났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그 삶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줄 보석이었다. 보석은 제멋대로 어딘가로 굴러갈 수 없으니, 클로드는 더욱 연금술에 매달린다. 그러던 중 에스메랄다는 근위병인 페뷔스에게 마음을 뺏기고 보석을 탐내는 다른 이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운 마음에 클로드는 페뷔스를 죽이려고 시도한다. 페뷔스가 죽었다고 믿었던 클로드는 잠시나마 평안을 되찾지만 미수에 그쳤음을 깨닫자 이내 조급해진다. 결국 클로드는 신을 모욕하는 악행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잠행에 나선다.
클로드의 뒤틀림은 낯설지 않다. 자신이 우는데 연민을 느끼지 않느냐며 에스메랄다에게 화를 내고, 사랑을 갈구하면서 그녀를 납치하고 겁탈하고자 하며, 자신이 갖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가져선 안 된다며 에스메랄다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클로드는 사랑이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만, 그의 눈에 에스메랄다는 그저 만만하고 아름다운 집시 여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감히 보잘것없는 집시 따위가, 고귀한 내 사랑의 가치를 몰라보고 젊고 잘생긴 근위병 하나에 마음이 뺏긴다는 것이, 그의 열등감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클로드를 끝까지 거부하며 페뷔스를 기다리지만 그녀라고 해서 페뷔스를 인간적으로 사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랭그루아가 어떻게 하면 에스메랄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냐는 질문에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제 몸 하나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세상에 울타리가 필요했던 중 마침 자신을 구해준(직업상 마땅히 그 일을 했어야 하는) 페뷔스가 적격인 인물로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에스메랄다는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시대를 살기엔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만큼 어리석었다. 순백하게, 무지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자신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동시에 무지하다. 연민으로 베푼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호의를 베푼 인물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랭구르아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데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성적 욕망에 못이겨 에스메랄다와 동침하길 원했고, 콰지모도는 제 뜻대로 에스메랄다의 곁에 누워 백골이 된다(에스메랄다가 원했을까?). 에스메랄다는 단지 제 할 일을 했을 뿐인 페뷔스에게 무조건적인 진정한 사랑을 바라고, 페뷔스는 에스메랄다의 호감에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집시들은 단지 아기가 예쁘다는 이유로 훔쳐간 것도 모자라 기형아를 젊은 귀딜에게 주었으며, 귀딜은 그 사건으로 수녀가 되어서도 집시만 보면 모욕하기 바쁘다. 귀머거리 재판장은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자 근엄하게 군중을 모욕하고, 군중은 권력자를 향한 분노를 약자에게 풀면서 그들의 화를 감당하도록 요구한다. 자신의 욕망을 내세우지 않는 선인은 아무도 없다. 에스메랄다조차도.
빅토르 위고는 선인이 없거나 선인이 있을 수 없었던 당대를 보았던 것 같다. 빅토르 위고는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고 말하며, 인쇄술이 도래하면서 건축술이 사망하는 시대였음을 지적한다. 유동적인 상징체계를 형태화하여 가시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내던 건축술은, 인간의 상상력에 제약을 가하고 문맹의 불편함을 잊게 만들었다. 인간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신의 비루함에 겸허함을 표하고 만들어진 신성을 떠받들며 고개를 조아린다. 오랜 시간에 거쳐 만들어진 건물은 로마네스크부터 고딕까지, 사회 전반의 문화적 뿌리를 담지했다. 숭고한 건축술 앞에서 감히 발을 내딛지 못하던 인간들이 책 앞에서는 경솔하고 담대해진다. 고정된 형태는 없고, 유연한 사상만이 종이에 담긴다. 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서 보이는 것 너머를 탐내게 만든다. 믿음은 지성에 자리를 내어주고, 가볍고 용이한 책은 발도 없이 멀리 뻗어간다. 성직자들은 정통성을 잃을까 염려하지만 종교적 권위의 추락은 막을 길이 없다. 학자와 예술가들은 계몽의 파도를 기대하지만 여전히, 대중은 무지했다.
작품의 곳곳에서 드러나듯 군중은 사유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에게 부과되는 책임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광인절에서 연극이 빨리 시작되지 않자 배우를 목매달라며 소리치고, 금화가 나뭇잎으로 변했다며 에스메랄다를 마녀로 모는 말을 지어내고, 타인의 곤란과 불행을 비웃으며 안도감을 느낀다. 기적궁에 모인 부랑자나 이방인 등은 온갖 이름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세속적 질서의 부조리를 인지하고 나름의 질서를 부여한 공간을 유지하지만, 그들 또한 무지하기 때문에 에스메랄다를 구하겠다고 나선 폭동의 방향성을 읽고 왕이 보낸 군대에 처절히 짓밟힌다. 인쇄술의 발전이 인간의 지성에 빛을 가져다주려면, 우선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최소한의 인내심을 먼저 갖춰야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중의 삶에서 그런 능력과 인내는 헛된 것이었다.
군중의 입장에서 타락한 종교가 힘을 잃는 것은 마땅히 기뻐할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추하게 생긴 이를 교황으로 추대하며 울분을 흥겹게 풀어내는 행사를 묵인한 것은, 그만큼 성직자의 부패가 심각했다는 것과 함께 종교적 권세가 추락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은 광인절을 진심으로 즐겼다. 하지만 종교적 질서가 흐트러진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나아지긴 힘들어 보인다. 귀머거리 재판장이 진행하는 재판이 그렇듯, 어차피, 부조리로 가득하기 때문에 군중이 믿고 따를 기존의 질서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질서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지성은 군중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를까. 진정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인물은 콰지모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결국 타락한 존재를 사멸시켰고, 스스로를 벌했으며, 부당하고 외롭게 죽어간 누군가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이었'던 것을 스스로 죽이고, '내가 사랑한 모든 것' 곁에서 죽어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