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좀 멋있어 보이는 방법

슬기로운 습지 생활

by 무엇이든 씁니다

주말 아침 눈 뜨자마자 우리는 동네 습지로 간다. 여름이 산책도 시킬 겸, 그 핑계로 운동(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의 걷기와 조깅)도 할 겸, 그리고 오리도 볼 겸. 딸아이는 오리를 본다며 지난주 아빠에게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졸라서 새벽 배송으로) 받은 망원경을 챙겨 갔다.



습지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오~~ 저것 좀 봐!"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저거 황조롱이야. 황조롱이. 호버링 하고 있어."


호버링?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바람을 맞서며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긴 했다. 부챗살 모양의 펼쳐진 꼬리깃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머리만큼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남편이 호버링(hovering, 정지비행)은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흥분했다.(지나고 보니 우리끼리 흥분하느라 동영상 못 찍은 것이 아쉽;;) 남편과 내가 호버링에 홀딱 빠져 있는 동안 딸의 질문이 쏟아졌다.


아빠, 호버링이 뭐야?

지금 보는 것처럼 정지 상태에서 나는 거야.

정지비행?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게 바로 황조롱이만의 능력이야. (중력과 양력이 같아야 하고, 항력과 추력이 같아야 한다는 설명을 한마디로 정리ㅋ)

근데 정지비행은 왜 하는 거야?

먹이를 찾는 거지.


바로 그때, 호버링을 하던 황조롱이가 풀숲으로 급강하했다. 우리와 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어서 그쪽으로 가볼까 생각하던 순간에 다시 날아오르더니 근처의 교각 아래로 사라졌다. 아마도 교각 아래에 둥지가 있는 모양이었다. 집에 와서 도감을 찾아보며 알게 된 사실은 황조롱이가 위는 볼 줄 모르고 앞만 보는 아주 좋은 먹잇감 쥐를 잡기 개발한 기술이 호버링이라는 것이다. 한다. 그러니까 그날은 교각 아래 황조롱이 가족이 포식하는 날이었다.



그렇게 맨눈으로 황조롱이의 호버링을 지켜본 후 우리는 확실히 조금 흥분했고 주변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매번 가는 습지가 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망원경으로 구석구석 살펴보니 습지에는 매일 흔히 보는 흰뺨검둥오리와 청둥오리, 백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래톱이 있는 곳에는 물떼새 또는 할미새로 추정되는 작고 날렵한 새들이 분주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고, 검은 가마우지 한 마리도 날아들었다.


망원경으로 오리를 관찰하다가 흰뺨검둥오리가 아닌 특이한 오리를 발견했는데, 집에 와서 도감을 찾아보면서 남편은 미국쇠오리, 나는 가창오리 또는 청머리오리라고 주장했다. 남편은 머리 모양과 색깔을 근거로 들고 나는 꼬리깃 모양을 근거로 들었다. 남편이 가창오리는 군집생활을 하기 때문에 저렇게 홀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했고, 나는 날아가다가 뒤쳐져 남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가만 듣던 딸이 아빠 의견에 1표를 던지면서 2대 1로 미국쇠오리로 기울어진 상태다. 다음 주에 가서 다시 확인해야지.


우리가 습지에서 본 새들


아빠는 어떻게 새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알아?"


딸은 새에 대해서 (우리보다) 많이 아는 아빠에게 경이로운 시선을 보냈고 남편은 으쓱해하는 눈치다.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생물 시간에 배웠던 분류체계인 '종속과목강문계'까지 알려주며 도감 찾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어 잡지식이 많은 딸에게 늘 구박을 받던 남편이 명예를 회복한 기분이려나? 내가 좋아하는 포카 폰타스 주제곡 'colors of wind'은 이렇게 시작하는데, 아마 남편의 마음이 이럴지 모르겠다ㅎㅎㅎ


You think I'm an ignorant savage

And you've been so many places

I guess it must be so

당신은 내가 무지한 미개인이라고 생각할 테고

너는 틀림없이 많은 곳에 가봤겠지


But still I can't not see

If the savage one is me

How can there be so much that you don't know

You don't know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신이 말하는 미개인이 바로 나라면

어떻게 당신이 모르는 것이 이렇게나 많을 수 있을까


오늘 새삼 깨달았다.

1. 우리 가까이에 생각보다 많은 생물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점

2. 알면 더 많이 보인다는 점

2. 내가 아는 남편이 남편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ㅋ

3. 딸에게 뇌섹남으로 인정받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배워두었다가 어느 날 대방출해보자. 아마 딸이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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