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그대로인 것들

by 무엇이든 씁니다
엄마는 너무 옛날 사람이야."


아이돌 노래 좀 모른다고 딸이 구박을 일삼는다. 나와 달리 아이돌 노래는 물론이고 최신 유행과 신조어를 거의 꿰고 있는 남편은 딸에게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딸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난다.


이름으로 별명 짓기

우리 딸 이름은 이소ㅇ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이 소고기, 소보루, 소시지 등등이 있다. 개중에서도 '소고기'라는 별명이 제일 많이 불려진다. 4년 내내 '소고기'라는 별명이 싫다며 울상이던 딸이 5학년이 되더니 전격 '소고기'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한다. 오빠가 '무'처럼 생겼다고 붙여준 '무'라는 별명을 가진 단짝 친구와 결성한 비밀클럽 암호명도 '소고기 뭇국'이다. 내 별명에 비하면 '소고기'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편에 속한다. 내 이름은 연ㅇ이고 나랑 붙어 다니던 절친의 이름도 똑같아서 둘이 같이 불릴 때는 쌍연ㅇ, 따로 불릴 때는 큰 연ㅇ, 작은 연ㅇ라고 불려서 매일 별명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소고기의 운명을 받아들인 딸에게 읽어보라 권한 책


비자금 책장 사이에 숨기기

남편이 딸 이름 앞으로 지급된 지자체 재난 기본소득을 딸에게 현금으로 주었다. 딸이 용돈을 받으면 넣어두는 서랍이 있는데, 우리 집에 아이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서랍이 딸의 금고라는 걸 알아버렸다. 새로운 금고를 찾아 이리저리 궁리를 하더니 낙점한 곳이 겨우 책이었다. 책장 사이에 돈을 끼우는 걸 보면서 우리 부부는 빵 터졌다. 어린 날 우리의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다. 내가 주로 돈을 숨기던 곳은 장판 밑 아니면 책장이었다. 책장 사이에 숨겨두었다가 어느 책인지 까먹고, 책장에 숨겨둔 사실조차 까먹고, 엄마가 헌책을 고물상에 팔아버려 고물상에 찾아가서 책을 찾아 헤매던 일도 생각났다. 물론 실만 있었던 건 아니고, 동생이 책장 사이에 숨겨둔 돈을 발견하여 몰래 꿀꺽한 일도 있었다.ㅎㅎ


빈병 주워서 용돈 모으기

딸의 단짝 친구가 '우리는 돈 벌러 갑니다(진형민, 창비)'를 읽은 후 빈병을 모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딸에게 알려주었고, 그날로 딸과 단짝 친구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빈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뭘 주워왔는지를 알 수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돌고래 함성소리가 나면 맥주병을 주운 것이다. (소주병은 100원, 맥주병은 무려 130원!!!) 개학도 미뤄지고 심심하니까 그거라도 하면서 킬링타임 하라고 두었더니, 점입가경이다. 캔맥주를 마시는 우리에게 '맥주는 병맛'이라며 병맛 캠페인을 벌이 지를 않나, 이 동네 저 동네 다녀보고 동네별 분석과 나름 의미 있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로 검증하고, 가설을 수정하면서 나름 과학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ㅇㅇ동네 사람들은 ㅇㅇ동네 사람들보다 술을 잘 안 마신다.

술은 주로 저녁에 마시니 아침에 나가면 병이 많을 것이다.

금요일 저녁에 회식이 많으니 토요일 아침에 나가면 병이 많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보다 일찍 나가야 병을 주울 수 있으니 토요일 새벽에 나가보자.


이러다 어르신들 소일거리까지 넘보는 건가? 병을 주우러 나가기 위해 합숙까지 하겠다는 아이들의 열정을 말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따라나섰다. 한 시간 가량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맥주병 3개를 주웠다. 이렇게 주워온 빈병이 마당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약 6500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남편이 재난 기본소득을 주면서, 이거 받으니까 빈병 줍기 싫지? 물었더니 단호하게 아니라고 한다. 단 100원이라도 제 손으로 버는 재미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병 모으는 재미가 있는 건지, 계속하겠다고 한다.


병 세는 재미에 빠진 딸


어릴 때 나도 용돈을 벌기 위해 빈병(그땐 공병이라고 했었다)을 주우러 다니고 신문도 돌리고 했던 기억이 있다. 동생은 학교 안 가고 몇몇 애들이랑 어울려 병 주우러 다니다가 부모님한테 들켜 혼났던 기억도 있다. 나는 아직 말릴 생각은 없고 지켜보려고 한다. 아이들의 빈병 줍기는 어떻게 진화하고 어떻게 끝나게 될까? 수익금을 어떻게 쓸지는 정하지 않았고 '소고기 뭇국' 기금에 적립해두기로 했다고 하던데 나중에 수익금 때문에 분쟁이 나려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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