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Apr 16. 2020

집은 호텔이 아니다

외장이 마무리되다

"아, 좋다. 역시 집이 최고네."


동네를 돌아다니며 실컷 놀다 들어온 딸이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로 어디 가지도 못 하고 집콕 생활을 하는 요즘 들어 부쩍 '역시 집이 최고'라는 말을 많이 한다. 집이 최고라는 말이 듣기 좋으면서도 한편 의아했다. 가끔 호텔 가고 싶다고, 보송보송한 침대 시트에서 자고 조식 뷔페가 먹고 수영하고 싶다고 호텔 타령을 하던 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호텔이 그립다고 하지 않았어?"

"물론 호텔도 좋지. 보송보송한 침대 시트랑 조식 뷔페랑... 하지만, 좋은 호텔도 집만은 못해."


딸이 최고로 꼽는 그리스 사모스섬의 허름한 호텔


딸과 대화하면서 좋은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재작년 딸과 한 달간 유럽여행을 하면서 최고급 호텔에서부터 허름한 게스트하우스까지 온갖 종류의 숙박시설을 다 경험한 딸이 최고의 호텔로 꼽은 곳이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 아니라 그리스 사모스 섬의 3만원짜리 허름하고 아날로그적인 호텔이었다. 에어컨도 없어서 밤에 잠을 설치고 조식도 부실했지만 바로 바다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위치와 모래 뭍은 맨발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편안한 로비, 개와 고양이가 호텔 안팎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는 동물적인(?) 분위기가 편안하고 좋았다고 했다. 그리스 여행에서 본질은 지중해에서의 수영과 일광욕, 맨발의 자유로움이라는 걸 아는 게다.


집과 호텔에 대한 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좋은 집이란 럭셔리한 인테리어, 빵빵한 냉난방, 훌륭한 조망, 매일 깨끗하게 청소되는 청결함과 쾌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딸이 최고라고 하는 지금 우리 집 역시 최고의 불편함과 최고의 지저분함을 자랑하고 있다. 안 그래도 깔끔한 집이 아니었던 우리 집은 이사를 앞두고 더 너저분해지고 있고, 보일러를 잘 안 틀어서 냉랭할 때가 많고, 세탁기가 고장 나서 손으로 빨래를 짜서 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딸이 '집이 최고'라고 말하는 건 집의 껍데기인 하드웨어가 아니라 우리집 라이프스타일과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닐까? 집 짓는 문제로 극한으로 싸우던 시기를 지난 우리 부부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협력하는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되어 있다. 다른 아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우리 부부는 대화를 참 많이 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거 같다. 그 안에서 딸도 편안함,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외장이 마무리 된 세 집,  맨 왼쪽 하얀집이 우리집


좋은 집이란 이런 것인데도 집을 짓다 보면 겉모습에 매달리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집의 모양과 평면, 창호, 지붕, 외장까지 고비를 넘기면서 그럭저럭 잘 지나왔다 생각했는데, 이제 내부 인테리어라는 한 차례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 서로 이야기하고 기대했던 것처럼 잘 되지 않으니까 속이 상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헛된 기대를 한 내 탓이다. 집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는 것에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을 빌리면 집 짓기는 최고의 시간이면서도 최악의 시간, 지혜의 시간이자 어리석음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누르고 피함으로써 감춰왔던 나의 민낯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언젠가 한번은 필요한 일이었기에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어리석은 시간을 지나고 지나, 1년간 울고 웃고 마음 졸였던 고단한 집짓기 여행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도착할 곳이 딸이 말하는 '최고의 집'이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은 백만 스물두 가지의 선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