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Apr 13. 2020

집은 백만 스물두 가지의 선택

타일과 위생도기 고르기

집 짓기는 백만 스물두 가지 선택의 과정이다. 즐겁다면 즐겁고, 힘들다면 힘든 과정이다. 쇼핑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후자에 가깝고,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전자에 가까울 것 같다.


선택과 결정을 하다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남편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나는 좋은 말로 하면 신중하고, 남편은 신속하다. 바꿔 말하면 나는 우유부단하고, 남편은 일단 하고 본다. 나는 실수나 실패를 두려워하고, 남편은 적어도 니보다는 실수나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집을 짓지 않으려고 했고, 남편은 집 한번 지어보자 했나 보다.


주말에 타일, 위생도기를 선택하면서도 성격이 드러났다. 우리 집을 설계한 소장님 중 한 분과 함께 쇼룸이 있는 매장에 가서 같이 고르기로 했다. 나는 일요일에 멀리서 오시는 소장님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름 고민하고 준비했다. 나는 취향보다는 예산에 타협하기로 했다. 그동안 많은 호텔과 카페와 잡지에서 봤던 디자인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아래 원칙에 부합할 거라고 생각되는 두어 가지 스타일로 압축했다.


1. 우리 예산 안으로 들어오는 것(좋은 건 한도 끝도 없다는 생각)

2. 유행타지 않고 깔끔한 스타일(유행은 바뀌고 튀는 건 쉽게 질린다는 생각)

3. 청소와 관리의 용이함(다른 덴 몰라도 욕실, 화장실만큼은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


요즘 많이들 하는 건식 오픈형 세면대와 화장실은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건식이 유행하기 한참 전 미국에서 홈스테이 할 때 건식 세면대와 화장실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던 기억이 있어서다. 세수할 때 아무리 조심해도 물이 흥건했다. 건식 세면대는 세면을 하면 안 되고 정말 손만 씻어야 한다. 세수하고 나면 타월로 마룻바닥 물기 닦아내고 머리카락 줍고 뒷정리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오픈형 세면대는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해도 어수선해지기 쉬워서 우리는 욕실, 화장실, 세면대를 원룸으로 통합했다. 흔히 욕실 어느 면에 포인트 타일을 하기도 하는데 나는 어설픈 포인트는 촌스러워질 수 있어서 원톤으로 깔끔하게 가기로 했다. 그런 면에서 미리 골라놓았던 문 색깔에 대한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때 욕실 디자인까지 같이 고민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이었다. 1층은 화이트, 2층은 아이보리 웜톤 또는 라이트 그레이 쿨톤 둘 중 하나로 정해놓고 갔기 때문에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나름 예산 안으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1층 화장실용 화이트 정사각형 타일은 우리 예산의 3배라고 했다. 나는 머리가 띵했고 순식간에 갈 일을 잃은 느낌이었다. 1층은 이거, 이렇게 정해놓고 플랜 B를 고민하지 않은 것이 함정이었다. 1층부터 해결이 안 되니 2층 것도 고르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남편이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난관에 빠진 1층 화장실은 일단 제껴두고 2층 욕실 타일부터 골랐다. 남편은 원하는 디자인이나 이미지를 정해놓고 찾는 방식이 아니라 그 매장에 있는 타일을 뒤적이며 자기 취향에 맞는 걸 골라냈다. 약간 펄 들어간 아이보리 색과 거친 질감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다행히 우리 예산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욕실 벽 만지면서 살 거야?"


나는 남편이 욕실 질감 강조하는 게 재미있어서 놀려댔다.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오시는 분들은 욕실 벽을 꼭 만져주시길^^) 하지만 남편은 질감이 색감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자기가 고른 타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호텔 느낌이라고 했다. (응? 어떤 호텔? 따지진 않았다ㅋ) 나는 좀 더 밝은 색 타일을 원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너무 막연한 상태였다. 정해진 시간이 있어 마냥 찾아 헤맬 수도 없었다. 남편이 자기 선택에 만족을 하니 한 사람이라도 만족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남편의 픽으로 결정했다. 남편은 살다가 정 마음에 안 들면 바꾸자고 했다.


남편이 직접 고른 욕실 타일 조합(질감이 느껴져야 할텐데ㅎ)


이후 우유부단한 데다 갈길을 잃은 나 대신 남편이 타일, 세면대, 수전, 수납장까지 쭉쭉 결정해나갔다. 세면대는 두께가 얇고 깊이감이 있어야 하고 사각은 보기엔 예쁘지만 코너에 물때 끼고 청소가 힘들다, 둥근 걸로 해야 씻고 나서 한번 쓱 청소할 수 있다. 수전은 직수로 떨어져야 물이 잘 안 튄다, 등등 디자인 말고도 나름 보는 선택의 기준이 있었다. 들어보면 모두 경험에서 온 논거가 분명했고 모두 수긍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뒤에서 구경만 하다시피 했다. 매장 사장님이 보통 아내가 고르고 남편들은 뒤에 앉아있는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특이하다고 했다. 남편이 안목이 있는 것 같다며 립서비스를 곁들였다. 남편의 안목이 후지지 않은 건 인정. 하지만 안목은 둘째치고 나는 정해진 예산과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선택을 마친 남편이 고마웠다. 아마 나 혼자 갔으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런 남편이랑 살아서 머리숱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나보다. 그래서 둘이 같이 사나 보다.ㅎ


매거진의 이전글 집 지으며 아빠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