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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pr 03. 2020

집 지으며 아빠 생각

보일러 배관하고 방통 치는 날

집 짓는 현장에서 쓰는 말들은 가끔 호기심을 유발한다. 일본어에서 온 말이 많고, 가끔 콩글리쉬가 섞인다. 방통 친다고 할 때 맥락상 방바닥 작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문득 정확한 뜻이 궁금해서 찾아보니까 '방바닥 통째로 미장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뭔가 심오한? 기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줄임말이었다니...그런데 보통 미장은 '한다'라는 동사를 쓰는데, 방통은 왜 '친다'고 할까? 그 차이가 궁금하던 차에 현장 사진을 보니 뉘앙스 차이가 느껴졌다. 미장은 사람이 손으로 반죽을 덜어 살살 펴 바르는 거라면, 방통은 특정 장치로 시멘트 반죽을 들이붓고 뭔가 큼지막한 도구를 써서 펴는 작업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친다'고 하는 거 같다.(아님 말고ㅋ)



방통 치는 날,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한텐 보일러 설비 국가자격증이 있고 지금도 가끔 보일러 시공을 하신다. 딸이 집을 짓는다니 당연히 우리 집 보일러 배관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빠는 뛰어난 기술자이기에 아빠가 작업을 해주면 좋겠지만, 엄마가 세 집이 같이 짓는데 현장을 번거롭게 만들면 안 된다고 애저녁에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렇게 기술자 아빠는 딸 집 짓는데 평생 기술을 써먹지 못하고 도면만 뜯어 보다가 분배기 자리만 정해주었다. 코로나만 아니면 진즉에 올라 와서 살펴 보셨을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멀리서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빠가 점지해준 분배기 위치


집을 지으면서 아빠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생각난 건데, 한 때 생태건축, 생태공동체 등에 빠져 있을 때 흙과 짚으로 짓는 스트로베일 하우스를 아빠와 함께 배워서 지어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온갖 기술자다. 어릴 때 우리가 살던 집도 아빠가 거의 짓다시피 했다. 건축시공, 보일러 등 각종 설비, 전자제품 수리 등 못하는 게 없다. 그렇게 완벽한 아빠의 유일한 단점은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이다. 아주 아주 정직한 비용으로 자기집처럼 꼼꼼하게 작업하고, A/S까지 무한대로 해주다보니 지역에서는 워낙 정평이 나 있어서 칠순이 넘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닌다. 동네 사람들, 친척들, 사돈의 팔촌의 지인들도 집에 문제가 생기거나 뭐만 고장나면 아빠를 부른다. 아빠는 밥벌이보다는 그냥 사람들에게 도움주는 걸 좋아하는 거 같다. 누가 부르면 기꺼이 가서 시간을 내서 일하고 커피 한 잔, 술 한 잔, 밥 한 끼 얻어먹는 걸로 퉁치곤 한다.


자기 집은 손도 안 대면서 남의 집을 자기집처럼 실속도 없이 손 봐주고 다닌다고, 한때 엄마는 아빠를 답답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도 그런 실속없는 아빠를 좋아한다. 아빠 친구들은 은퇴하고 할 일이 없어 무료해하는데, 아빠는 자기 기술이 있어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니 심심하지도 않고 소일거리로도 좋다는 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아빠가 기술자인 게 자랑스럽고 아빠의 직업이 마음에 든다. 큰 돈에 대한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칠순이 넘어도 소일거리로 할 수 있고, 이웃들에게 소소한 도움도 주고, 내 집 문제도 직접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도 나중에 나이들어서도 써먹을 수 있는 생활의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고, 딸아이도 그런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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