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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ul 07. 2020

새집 같지 않은 이유

완공과 이사

예전 집이랑 거의 똑같은 거 같아."


이사온지 한 달 하고도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우리 집에 오간 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줄 인상 평을 남긴 사람은 올해 중학생이 된 친구 딸 윤이다. 물론 쓰던 살림을 그대로 가져오긴 했지만, 하드웨어가 달라졌는데 달라진 게 없다니... 너무 한 거 아니니?


윤이에게 집을 하드웨어로 인식하는 게 아니었다. 집에 사는 사람과 삶의 방식, 그리고 전반적인 분위기를 집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긴, 새집이라고 새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새집이라고 새로운 삶이 짠, 하고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일 뿐이고, 결국 사는 사람이 집을 완성한다. 결론적으로 이 집은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남편은 윤이의 말이 왠지 모르게 칭찬으로 들린다며 좋아했다.


이사 오기 전에는 매일같이 버리는 게 일이었다. 막판에는 트럭까지 불러서 그동안 업보처럼 짊어지고 다니던 책을 다(는 아니고 절반 정도) 실어 보냈다. 그렇게 버리고도 또 산다. 코 앞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이케아도 처음으로 가보았고, 폭풍 검색과 인터넷 쇼핑의 결과 거의 매일 택배 상자가 도착하고 있다. 가장 크게는 딸 침대부터 작게는 월 범폰(문고리 손잡이가 벽에 부딪힐 때 생기는 충격, 소음을 방지하기 위한 고무 스티커), 스토퍼까지. 이번에 새삼 깨달은 건 '세상엔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사실'. 혹시 이런 게 있을까? 검색해보면 무조건 다 있다.


새 집에서 첫날밤을 보낸 여름이


새집이 새집 같지 않다는 말을 들은 가운데 우리 집에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반려견 여름이를 집안으로 들인 것이다. 아직 여름이가 기거할 뒷마당에 펜스를 설치하기 전이고 옆집에 어린아이가 있어서 밖에 묶어두기에는 걱정이 되고, 주변에는 고양이 천국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처음에는 현관문과 중문 사이의 현관에만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로켓 배송으로 라벤더향 고급 개 샴푸를 주문하더니 난생처음 목욕을 시키고 집안으로 들였다. 여름이와 같이 TV를 보는 게 소원이라던 남편과 딸은 아주 신이 났고, 여름이도 어리둥절했지만 이제 여름이도 편안해졌다. 처음엔 못마땅했다. 큰 개가 집에 들어온 것도 못마땅하지만 여름이 목욕한 첫날 몸에서 라벤더향이 아닌 개 비린내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처음이라 그런다며 한번 더 시키면 라벤더향이 날 거라며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라벤더 향은 나지 않지만 개 비린내도 거의 사라졌다(아님 익숙해졌거나).

엄마, 왜 여기로 이사 온 거야?"


(따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사 온 첫날 좋아라 하던 딸이 하루 만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집은 좋지만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동네에는 초등학교도 없고, 아이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딸에게 좋은 집의 유효기간은 단 하루뿐이었다. 돌아다니면서 친구를 마주칠 수 있는 만만한 동네가 훨씬 중요하다. 또 하나 접수된 불만은 이 동네는 자전거 타거나 산책하는데 재미가 없다고 했다. 전에 살던 동네는 모든 길이 막힘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이 가능하고, 적당한 오르막이 있어서 자전거 탈 때도 재미가 있는데 이 동네는 그렇지가 않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지형이 이토록 중요한지도 처음 알았다. 아이들은 환경적응동물이다. 끊임없이 놀거리를 찾아 동네를 헤매고 있다.


남편은 조금 부지런해졌다. 전보다 일찍 깨서 손바닥만 한 마당과 집 뒤편에서 부스럭거린다. 법정 조경 때문에 대충 심어놓은 나무들이 벌써부터 마르고 비실비실한데 그걸 살려보겠다고 물도 주고 흙도 돋우면서 안긴 힘을 쓰고 있다. 집만 지으면 AtoZ까지 다 할 것처럼 하더니 이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은근슬쩍 나에게 일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나더러 문자로 비설거지를 하라지를 않나, 여름이 산책을 시키라는 잔소리를 하질 않나, 어젯밤에는 야식을 해 먹더니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를 남겨두고 가셨다. 일할 때 불편하다며 싱크대를 900mm까지 높인 것이 누구였더라? 그렇게 싫다는데도 집 짓고 싶어 하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남편 보고 있나?!!!)


남편 키에 맞춘 싱크대


부모님과 친한 친구들은 아직 초대를 못했다. 하지만 가깝게 지내던 옛 동네 친구들과 새 동네 이웃들은 종종 놀러 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바로 뒷집 할머니다. 이사 떡을 돌린 다음날 아침 까만 봉지를 들고 집에 놀러 오셨다. 까만 봉지에는 퐁퐁이 들어있었다. 동네 슈퍼에 가서 가장 좋은 걸로 달라고 하셨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주문한 믹스커피가 없어서 얼른 옆집에 가서 빌려와서 커피를 타드렸다. 커피를 드시면서 할머니는 본인의 신상정보와 가족사를 집약적으로 들려주셨다. 할머니 나이는 무려 88세였다.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로 할머니는 걱정이 없다고 하셨다. 난 걱정이 좀 많이 있는데, 장수 욕심은 없지만 걱정은 좀 덜고 싶다. 할머니에게 한 수 배워야겠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 집 마당이 잘 보인다. 수돗가 옆 나무가 너무 예쁘다고, 나무 이름이 뭐냐고 여쭤보았는데, 이제 곧 빨간 꽃이 필 거라고 대답하셨다. 할머니가 다녀가시고 3주가 흘렀지만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할머니의 시간관념이 나와 다른 것만은 분명하다.


비 오는 날 우리 집에서 보이는 할머니 집 마당과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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