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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Sep 09. 2020

바람 잘 날 없는 집

에어콘 없이 여름 나기

"여름에 어떻게 지냈어?”

친구가 안부를 물었다. 이사오자마자 집 구경 온다는 걸 에어컨 없어서 여름엔 안 된다고, 여름 지나고 오라고 했더니 선풍기를 선물로 보냈던 친구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여름을 걱정했다. 올초부터 역대급 더위가 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고(하지만 역대급 장마였고!),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예보도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컨 없는 집에 보내온 친구의 선물


우리 집에 에어컨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에어컨이 없이 살고 있다. 태생이 그런 건지 더위에 단련된 탓인지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데다 여름엔 땀도 좀 흘려야 땀구멍이 퇴화하지 않는다는 소신으로 어찌어찌 에어컨 없이 버티며 살아왔다. 하지만 봄부터 차에 에어컨을 틀 정도로 더위를 잘 타는 남편과 아빠를 닮은 딸아이와 살면서 에어컨은 매년 쇼핑 리스트에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에어컨이 있으면 봄부터 틀어댈 남편을 생각하니 쉽사리 들여놓지 못했다. 집 지으면서 에어컨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같이 집을 지은 옆집들은 일찌감치 시스템 에어컨을 계획하고 설치했지만 우리는 그럴 형편은 안 되어 중고 에어컨을 구해서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층층이, 방방이 에어컨을 설치할 수도 없고 하나를 설치한다면 어느 자리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올여름을 나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여름에 시원한 바닥을 만들어주는 대자리


우리에겐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우선, 바람이 지나는 바람길이다. 남편은 집짓기 전 시간만 나면 집터에 와서 한참을 머물고 관찰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 집터는 바람이 지나가는 바람길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 말이 맞다면 바람이 들고 나는 바람 길만 잘 터주면 될 것이었다. 집 지을 때 별다른 훈수를 두지 않던 부모님도 집은 무조건 맞바람이 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거의 틀지 않고 살고 있는 부모님의 비결도 맞바람이었다. 우리는 맞바람을 고민했다. 1층 거실과 방을 나란히 두고 거실 창문과 방의 창을 일직선 상에 마주 보게 했다. 과연 우리의 계획처럼 맞바람이 쳐줄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기대가 적중했다. 우리 집이 남동향이다 보니 여름 남동풍이 제대로 불어왔다. 문을 열어두면 거실 커튼은 늘 바람에 나부꼈다. 삼복더위에도 바람만 불면 덥지만 무덥지 않고 살만 했다. 왜 어른들이 맞바람, 맞바람 하는지 살아보니 알겠다.


바람이 불어 늘 나부끼는 거실 커텐


이제 바람길에 앉은 집으로 들고 나는 맞바람을 집 전체에 순환시켜주면 완벽하다. 계단 보이드 오픈 천장에 설치할 계획으로 일찌감치 해외 직구로 실링팬을 사두었다. 실링팬 효과도 확실했다. 이사 오기 전에 복층으로 된 이층 집에 살았는데 여름에 2층은 너무 더워서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새집에서는 실링팬 덕분인지 2층이 그렇게 덥지 않았다.



한 여름에도 무덥다고 느낀 것은 바람 한 점 없고 습했던 며칠뿐이었고, 대체로 살만 했다. 딸아이는 가끔 에어컨이 있는 옆집으로 피서를 가고, 남편도 실링팬은 기본적으로 돌리고, 각방 선풍기를 가동하고, 시원한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달고 살았지만 큰 불평 없이 여름을 났다. 처서와 백로가 지난 지금 바람이 지나는 거실은 좀 쌀쌀하다고 느낄 만큼 시원한 바람이 집 전체를 관통한다. 이렇게 바람을 맞으며, 또 바람의 고마움을 실컷 느끼며 에어컨 없이 대략 성공적으로 여름을 났다. 내년 일은 내년에 생각하고, 일단 이 공을 모두 바람, 바람, 바람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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