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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Oct 13. 2020

죽은 자의 곳, 내가 사는 곳

나만의 커렌시아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달려가는 그곳

아침저녁으로 반려견과 산책 가는 곳

친구가 놀러 오면 구경시켜주고 자랑하는 곳

속 시끄러울 때 마음 가라앉히러 가는 곳

내게는 그런 곳이 있다.

그것도 가까이.

집에서 1분 거리인데 조금만 올라가면 산 정상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침 일찍 가면 일출을 볼 수 있고, 한낮엔 각양각색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멍 때릴 수 있고,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땐 소나무 사이로 스미는 석양에 넋을 놓게 된다.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이고, 얼핏 제주 오름도 보인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제일 중요한 거, 하루 종일 어느 때 와도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기보다 돌아가신 분들만 있다. 마스크가 필요 없는 그곳은 바로 뒷동산 무덤가!


제주 오름이 생각나는 봉긋봉긋 봉분들
저 멀리 보이는 북한산 능선


이곳은 역시 빨빨거리고 다니며 동네를 접수한 아이들이 먼저 발견했다. 이사오자마자(아니 집을 짓기 전 현장에 올 때마다) 딸과 친구는 매일 어디론가 쓱 사라졌다 오곤 했다. 어느 날은 돗자리를 들고 가고, 때로는 스케치북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건가 뒤따라가 보니 바로 무덤가였다. 예전엔 공동묘지는 담력 테스트 장소였는데, 여긴 밤에 와도 무섭기는커녕 포근하다. 휘영청 달밤에는 더욱 아름답다. 무덤이 무려 20기 정도 되는 어느 집안 선산인데 비석을 들여다보니 이 동네 터줏대감인 인동 장 씨 집안이다. 동네 어귀에도 인동 장 씨 집성촌이라는 표지가 있다. 선산의 가장 위쪽에 비석, 상석과 조경이 예사롭지 않아서 비석을 들여다보니 ㅇㅇ장군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면 나름 한 자리 한 집안인 듯하다.


좌측 상단의 하얀집이 우리집, 저 멀리 북한산


명당자리는 누가 봐도 명당이다. 일단 양지바르다. 동남향이라 아침부터 햇살이 쏟아지고, 긴긴 장마에도 전혀 습하지가 않았다. 나직한데도 동네가 한눈에 들어오고 팔 벌려 동네를 껴안은 느낌이 든다. 봉긋봉긋 솟아오른 봉분을 보고 있노라면 제주 오름이 생각난다. 가만 앉아 있아서 멍 때리고 있으면 이 세상과 다른 저 세상에 온 것만 같다. 이 세상에서 한 아름씩 품고 사는 근심 걱정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막힌 가슴이 탁 트인다.


무덤 두어개는 벌초를 안해서 더 운치가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묘지 쓰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고, 부모님 묘도 안 쓸 생각이다. 그런데 남의 집 묘지는 왜 이리 좋은지, 우리 집 가까이 이토록 아름다운 선산이 있어서 너무 좋다. 주말에 어떤 무례한 사람 때문에 화가 났는데 새벽에 여기 올라와서 미친 X 욕하고 나니 화 내서 뭣하나, 됐다 싶더라. 본인 피셜 사춘기인 딸은 여기서 친구와 비밀 얘기도 하고, 얼마 전엔 엄마(=나)가 자기 마음을 몰라줘서 속상하다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내 기억의 처음 언저리에 가면 철길을 지나 만나는 작은 언덕이 떠오른다. 딸도 이곳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내 마음 쉴 곳, 나만의 커렌시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다행인가! 특히 코로나 시대에! 멀리 명산이 있으면 뭘 하나. 눈 뜨면 달려갈 수 있는 가까운 동산이 최고다. 이 집안 조상님과 후손님들께 감사한다. 이 집안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한다. 진심!!! 여기에 잠드신 분들도 좋지 않을까? 우리가 매일 찾아와 재잘대고 간간히 비밀 얘기, 속된 말도 듣고 심심하지는 않으실듯ㅎ


묘역에 서 있는 소나무의 빛나는 빛깔 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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