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공동체에 대한 단상
동네 친구네가 시골집에 다니러 가면서 반려묘 (오)레오를 우리 집에게 맡기기로 했다. 우리 집에 맡기기로 전격 결정한 날부터 남편과 딸은 올림픽이라도 유치한 듯 흥분의 도가니였고, 레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리법석, 호들갑을 떨었다.
남편은 절친의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가는데 친구랑 술 마시러 가는 게 아니라 레오를 보러 간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고양이를 좋아한다. 퇴근할 때 딸의 이름 대신 고양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마트에 가서 한 달을 먹이고도 남을 고양이 간식을 사 왔다. 평소 일체화된 TV도 보는둥마는둥하고 즉석으로 고양이 놀잇감을 만들어 레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나한테 그렇게 정성을 쏟아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ㅋ)
딸은 하필 내가 쓰던 베개로 고양이 침대를 만들어 주었고, 고양이가 깨끗한 물만 먹는다며 내가 아끼는 하얀 볼에 고양이 물그릇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살짝 춥다고 느낄 정도로 보일러를 틀지 않고 지내는데 딸이 레오가 감기에 걸릴지 모른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3월 들어 처음으로 보일러를 가동했다. 누가 누가 레오를 더 사랑하나 경쟁이라도 하는 건가. 아주 가관이었다.
난 레오를 본체만체했다. 예전 남자 친구가 키우던 고양이를 목욕시키다 피투성이가 됐던 경험이 있어서 난 지금도 고양이를 보면 손목이 서늘하다. 무엇보다 나는 저들 부녀의 계략을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남편과 딸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에 어떤 틈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철통방어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이런...레오가 내 시야로 들어왔다. 자꾸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강아지처럼 막 치대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왔다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하룻밤을 지나고 레오는 조금 더 과감해졌다. 내 발을 살짝살짝 건드리고, 내 발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버티고 버텼다. 그렇게 정신무장하면서 지켰던 철통수비의 벽은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레오가 벌러덩 누워 자는 모습에 빵 터졌고, 그만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옛날의 트라우마를 잊고 나는 레오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렇게 레오와 행복했던 사흘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났다. 레오를 데리러 온 친구는 시골에서 청란과 파김치와 부침개 반죽을 가져왔다. 보기만 해도 너무나 예쁜 달걀이었다. 갑자기 '선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음이 시끄러웠던 하루의 끝이라 그런지 더 고마운 선물이었다. 남들이 보면 레오를 케어한 대가로 계란이라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레오와의 3일도 선물이고, 달걀도 선물이다.
선물은 'give and take'라는 등가의 거래가 아니다. 친구가 우리에게 선물을 줄 때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하며 준 것이 아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선물은 무한한 신뢰와 연대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고, 받는 것이 있으면 줘야 하는 동시적이고 등가적인 거래가 아닌 순수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땐 선물을 주고 받는 셈이다.
공동체의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정의는 라틴어 어원에서 오는 '서로 간에 주는 것'이다. 'community'의 'cum'은 '함께, 서로 간에'라는 뜻이고 'munus'는 '선물' 또는 'munere'는 '준다'를 의미한다. 그런 정의에 입각하면 우리는 공동체적 삶 속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공동체'에 꽂혀 환상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공동체'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큰 편이다. 환상을 가졌던 이유는 공동체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었고,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은 그 개념이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환상도 깨졌고(당연히 깨졌어야 했고), 회의도 여전하며, 공동체라는 말조차 꺼내기를 조심스러워하지만 고양이와 계란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나는 여전히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다. 글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심란한 하루의 끝이 이런 고민이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