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Feb 25. 2020

좋아하는 것과 이별하기

새 집과 헌 물건 4__그림책


미피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정말?


딕 브루너 그림책은 10년 전 소꿉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얻어왔다. 목돈 주고 전집을 샀는데 거의 보지 않아서 장식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내가 미피를 마음에 들어하자, 친구는 책장을 싹 비워 내 차에 실어주었다.


안녕!


미피는 딸아이가 아니라 내가 더 좋아한다. 처음엔 단순하게 귀여운 정도였는데 볼 때마다 오묘하게 달라 보이는 표정이 신기해서 좋았다.



딕 브루너 그림책은 선과 색, 이야기 모두 단순하다. 단순한데 지루하지가 않다. 많은 것을 생략한 대신 많은 여백이 있고, 그 빈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다양한 감정이 생겨난다.



딕 브루너는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직접 붓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터치감이 살아있다. 살아생전 딕 브루너 작업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던지 마치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숨죽여 봤었다. 역시 단순한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딕 브루너는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을 주로 쓴다. 갈색이 어쩌다 한번씩 나오지만 매우 드물고 매우 신중하게 사용한 느낌이다. 집, 학교, 옷, 자동차 등 무채색이 많은 우리 일상에서는 잘 보기 힘든 원색 컬러는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기분이 방방 뜨는 게 아니라 기분 좋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피의 꿈> 마지막 장면


단순함과 미니멀리즘 때문인지 일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생각이 복잡할 때,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 보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이번에 이사 가면서 책을 반으로 줄여가기로 목표를 세우고 매일 책을 솎아내고 있지만 미피 책장만큼은 성역이었다. 그런데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미피, 나도 좋아해'라고 말하자, '그럼,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호기롭게 말하고 속으론 좀 후회했다. 깨끗이 닦아서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일단 시간을 벌었다.



딸 아이랑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물티슈로 얼룩진 곳을 닦고, 다시 마른 티슈로 닦았다. 닦다 말고 그림에 빠지고, 이야기에 빠져든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딸아이가 돌쟁이 때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책을 본 것은 아니고 책을 물고 빨고 뜯고 찢고 가지고 논 걸 좋아했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열두 살 소녀가 되었다.



각자 애 키우고 사는 게 바빠 격조해진 소꿉친구 생각도 났다. 친구는 고향에서 살고 있어 부모님에게 가끔 소식을 전해 듣는데, 친구가 수간호사로 일하는 병원에 가면 꼭 달려와 인사를 하고 편의도 봐준다고 한다. 멀리 사는 무심한 딸보다 백배 나은 친구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로 시작하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났다.ㅋㅋ 마음이 바뀌었다고, 못 주겠다고 하면 웃기겠지...ㅎㅎ



질척대지말자. 친구가 나에게 흔쾌하게 보내준 것처럼 나도 미련없이 떠나보내자! 내가 필요없는 것만 주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나눠보자. 나도 그런 친구가 되어보자!ㅎ


깨끗이 비어진 미피 책장


미피, 그동안 즐거웠어!

잘 가!


좋아하는 것과의 이별은 역시 쉽지 않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아끼다 똥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