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과 헌 물건 4__그림책
미피를 떠나보내기로 했다.
딕 브루너 그림책은 10년 전 소꿉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얻어왔다. 목돈 주고 전집을 샀는데 거의 보지 않아서 장식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내가 미피를 마음에 들어하자, 친구는 책장을 싹 비워 내 차에 실어주었다.
미피는 딸아이가 아니라 내가 더 좋아한다. 처음엔 단순하게 귀여운 정도였는데 볼 때마다 오묘하게 달라 보이는 표정이 신기해서 좋았다.
딕 브루너 그림책은 선과 색, 이야기 모두 단순하다. 단순한데 지루하지가 않다. 많은 것을 생략한 대신 많은 여백이 있고, 그 빈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다양한 감정이 생겨난다.
딕 브루너는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직접 붓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터치감이 살아있다. 살아생전 딕 브루너 작업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던지 마치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숨죽여 봤었다. 역시 단순한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딕 브루너는 빨강, 노랑, 파랑, 녹색을 주로 쓴다. 갈색이 어쩌다 한번씩 나오지만 매우 드물고 매우 신중하게 사용한 느낌이다. 집, 학교, 옷, 자동차 등 무채색이 많은 우리 일상에서는 잘 보기 힘든 원색 컬러는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기분이 방방 뜨는 게 아니라 기분 좋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단순함과 미니멀리즘 때문인지 일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생각이 복잡할 때,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때 보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이번에 이사 가면서 책을 반으로 줄여가기로 목표를 세우고 매일 책을 솎아내고 있지만 미피 책장만큼은 성역이었다. 그런데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미피, 나도 좋아해'라고 말하자, '그럼,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호기롭게 말하고 속으론 좀 후회했다. 깨끗이 닦아서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일단 시간을 벌었다.
딸 아이랑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물티슈로 얼룩진 곳을 닦고, 다시 마른 티슈로 닦았다. 닦다 말고 그림에 빠지고, 이야기에 빠져든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딸아이가 돌쟁이 때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책을 본 것은 아니고 책을 물고 빨고 뜯고 찢고 가지고 논 걸 좋아했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열두 살 소녀가 되었다.
각자 애 키우고 사는 게 바빠 격조해진 소꿉친구 생각도 났다. 친구는 고향에서 살고 있어 부모님에게 가끔 소식을 전해 듣는데, 친구가 수간호사로 일하는 병원에 가면 꼭 달려와 인사를 하고 편의도 봐준다고 한다. 멀리 사는 무심한 딸보다 백배 나은 친구다.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 로 시작하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났다.ㅋㅋ 마음이 바뀌었다고, 못 주겠다고 하면 웃기겠지...ㅎㅎ
질척대지말자. 친구가 나에게 흔쾌하게 보내준 것처럼 나도 미련없이 떠나보내자! 내가 필요없는 것만 주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나눠보자. 나도 그런 친구가 되어보자!ㅎ
미피, 그동안 즐거웠어!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