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의 약발

때아닌 해맞이 소동

by 무엇이든 씁니다

눈을 떴다. 배가 싸르르하게 아파왔다. 어제 좀 속상한 일이 있었고, 화가 제대로 안 풀린 채로 잠 들었던 탓에 꿈도 뒤숭숭했다. 몸도 찌뿌듯했고, 독한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속도 아팠다. 어제의 화가 오늘의 일상을 덮치기 전에 풀고 싶었다. 화풀이랄까, 속풀이랄까, 암튼 뭔가 해장국처럼 뜨끈한 게 필요했다.


커텐 사이로 어스름한 여명이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거의 6시 50분이었다. 일출시간을 검색해보니 서울지역 6시 51분. 벌떡 일어나서 남편을 깨웠다.


왜 그래?

해 보러 가자!

응? 갑자기?

응!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남편이 부스스하고 일어나 주섬주섬 뭘 챙겨입는 사이, 남편의 속도를 기다릴 수 없는 나는 늘 준비되어 있는 여름이를 데리고 무덤가로 달려갔다. 엊그제 상강 아니랄까 봐 무덤가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우리집 지붕에도, 몇몇집 지붕에도 서리가 앉아 있었다. 근데 남편은 왜 안 나오는거야? 일어나는 거 같더니 다시 누워버린 건가, 체념하려는데 남편이 엉거주춤하며 나타났다.


해를 보면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지금 시간 6시 56분. 이미 5분이나 지난 시간이지만 아직 해 뜨기 전이다. 여긴 경기도라 시차가 있는 건가? 근데 서울의 해 뜨는 시간의 좌표점은 어디일까? 생각하는 사이 해가 앞산 어느 사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봉긋 떠오른 우리 동네 태양


오오~! 집앞에서 보는 일출이라니! 해가 미처 다 떠오르기도 전에, 본격적인 감상에 젖어들기도 전에 이제 해돋이 보러 지리산 가서 생고생 안 해도 되겠구나, 생고생하고 해돋이라도 보면 다행이지, 허탕 친 날들이 얼마였더라, 정동진은 또 어떻고, 가서 해는커녕 사람 구경만 실컷 하다 온 날도 수두룩 빽빽하잖아, 애 낳고는 귀차니즘이 발동하여 해 보러 가고 싶지 않은데 딸이 해맞이하러 가자고 졸라댈 때마다 TV로 보는 게 가장 좋다며 주저 앉히곤 했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년 신년 해맞이 장소는 여기가 딱이겠다, 해맞이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에계, 이게 끝? 아무리 동네 일출이라지만 이렇게 시시하게 떠오르시면 어쩌시나. 지리산이나 동해바다 일출처럼 장엄하고 멋지게 이글이글하며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해돋이는 분명 아니었다. 묵직하게 솟구치기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느낌, 뜨거운 태양보다는귀여운 햇님의 느낌, 꼬마 아이가 엄마 뒤에 숨어있다가 얼굴 내밀며 까꿍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하긴 실컷 자다가 슬리퍼 질질 끌고 나와서 보는 일출이 밤잠 설치고 야간 산행하며 생고생해도 볼까말까한 지리산 일출과 맞먹으면 되겠는가. 그럼 우리 동네로 다 몰려오게. 고건 도둑놈 심보겠지. 이 동네의 평화를 위해서도 안 될 일이다. 까꿍하고 떠오른 해는 우리 동네 스케일에 딱이었다. 맘먹고 가도 못 보는 일출보다 맘만 먹으면 매일 볼 수 있는 일출이 어딘가.


속풀이 일광욕


참 예의도 없지. 일출에 대한 양심 없는 비교가 난무하는 사이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덤가를 뒤덮었던 하얀 서리가 금세 녹아내려 반짝거렸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는 이 곳은 역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당 자리라서 기운이 다른가, 물방울들이 돋보기 역할이라도 해서 그런가. 햇빛이 내 배 위로 모이고 있었다. 자비로운 햇빛을 마중이라도 나가듯 배가 점점 앞으로 전진 나아가고 있었다. 레이저 광선 같은 햇빛을 맞고 있노라니 내 배 속에 뭉친 것들도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화도 싹 풀리고, 속도 시원하게 풀리고 완벽한 선라이즈 해피엔딩이었다...라고 끝나면 좋으련만 그런 극적인 약발은 없었다. 하지만 배에 뭉친 것들이 좀 흐물흐물해진 건 있다. 더 바라면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무덤에 와서 참 바라는 것도 많네, 하며 여기 누워 계신 분들이 단체로 벌떡 일어나 노여워하실지 모른다. 우리 동네 일출의 약발은 딱 여기까지. 나머진 시간이 풀어주거나, 점점 잊혀지거나, 그러면 되겠지. 최소한 어제의 화가 오늘의 나를 덮치지 않는 선에서 만족한다.


영문도 모르는 해맞이에 끌려나온 남편과 여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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