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리

시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by 무엇이든 씁니다

멀리서 친구가 놀러 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는 뒷집 할머니가 구부정하게 서 계셨다.


뒷집 할머니와는 앞이 아니라 뒤에서 주로 만나는 사이다. 우리 집 뒷편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거의 매일 서로를 보다시피 하고 인사하며 지내고 있다. 뒤가 아니라 삥 둘러서 앞까지 찾아오셨다는 게 뭔가 있다는 거다. 다리도 아프신데, 김장 준비하느라 바쁘신 와중에 그냥 하릴없이 놀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따로 용건이 있는 게 분명하고 뭔가 문제일 가능성이 크단 생각에 스스로 혐의점이 없는지 최근 일들을 떠올려 보면서, 만약 뭔가 분쟁이 발생했다면 우리 좋았던 관계는 이제 빠이빠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 일단 집 안으로 모셔 자리를 내어 드렸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찾으시는 믹스커피가 없어서 옆집에 빌리러 갔던 경험 때문에 미리 구비해놓았던 믹스커피가 다행히 남아있어 끓여 드렸다.


아니,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 짧은 시간에 떠올린 혐의점은 아무래도 할머니 마당이나 텃밭에 사람이 올 때마다 사정없이 짖어대며 경계 업무에 충실했던 우리 개가 아닐까...생각하던 중이었고) 아니, 오늘 밖에 통 안 나오길래 직접 와서 얘기해야겠다 싶어서 왔지. 아, 오늘 친구가 놀러 와서요(뜸들이지말고 빨리 용건을 말해보셔요). 그 있잖아. 우리가 내일 김장을 하거든. (알지요. 오늘 하루종일 배추 뽑고 무 뽑고 하셨잖아요) 내가 이번에 알타리를 안 심어서 동네 할머니한테 2만 원어치를 샀는데, 글쎄 여덟 단이나 가져왔잖아. 난 네 단이면 되는데. 그런데 힘들게 가져왔는데 도로 가져가라는 말을 할 수 있나. 그래서 애기 엄마가 혹시 김치 하려나 물어보려고 왔지. 비싸면 말도 못 꺼내는데 싸기도 싸고 알타리도 실하고 좋아서 말을 꺼내 보는거야. 아~~(일단 분쟁은 아니어서 다행이고, 요약하면 알타리 네 단을 만원에 사달라는 말씀) 전 친정 엄마가 김치 담가주셔서요, 김치 담그는 법도 몰라요. 한번도 담가본 적 없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오신 할머니를 빠르게 손절할 수 없어서 머리를 굴리다가 김치를 직접 담그는 옆집 엄마가 생각난다. 혹시 옆집 엄마가 김치를 직접 담그니 한번 물어보겠다고 말하고 일단 만원을 선불로 드린 후 친구랑 할머니네 집에 가서 알타리 네 단을 가져와서 우리 툇마루에 올려둠으로써 할머니의 귀여운 강매는 완료되었다.



그렇게 옆집 엄마를 기다리는데 오늘따라 퇴근이 늦어지자 괜히 피곤한데 알타리 얘기 꺼내면 알타리를 사야 할 거 같은, 김치를 담가야 할 거 같은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걱정이 되고, 그러는 와중에 난 언제까지 엄마한테 김치를 얻어먹을 수 있을까, 엄마가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엄마 떠나면 난 어쩌지, 하는 걱정이 깊어지면서,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볼까? 하는 호기로운 시험정신이 발동함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두려움이 팽팽히 맞서다가 에라, 모르겠다, 한번 해보자는 삽질 정신을 앞세우고 알타리를 물에 풍덩 담가버렸고, 허세스럽게 소금을 한 움큼을 쥐고 뿌려놓았다. 일을 저질러 놓고 나의 구세주, 나의 정신적 지주인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한번 해보지도 않았는데 못한다, 괜히 힘만 든다며 뜯어 말리더니 이미 알타리가 소금물에 삼투압 중인 소식을 듣고는 그럼 한번 해보던가, 로 태세 전환을 하며 초간편 버전으로 레시피를 일러준다.


먼저 찹쌀풀부터 쑤고...아놔, 첫번째 재료부터 없다. 그럼 밀가루로...밀가루도 없고, 부침가루 쬐끔 있어서 풀을 쑤어놓고, 집에 있는 재료들 시부모님이 농사 지어 보내주신 마늘 왕창, 맛 없어서 못 먹고 말라비틀어진 사과 한 알, 양파 한 알씩 까고 갈고, 대파, 쪽파는 없어서 패쓰, 멸치액젓, 새우젓으로 간 맞춰서 양념 만들어 둔 다음, 알타리를 살핀다. 한두시간 지난 것 같은데 파릇파릇 생생한 게 영 절여지는 기색이 없어서 소금을 더 낙낙히 풀어서 뒤적거려 본다. 한 시간 뒤 대충 풀이 죽은 알타리를 건져 물을 뺀 후에 양념이랑 섞어보면서 맛을 보는데, 간은 얼추 맞는 거 같은데 알타리가 알싸하게 맵기만 하고 도통 단맛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매실액은 똑 떨어졌고, 설탕은 좀 그렇고, 오래된 조청 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딸이 꿀을 넣어보라며, 학교에서 깍두기 담글 때 꿀을 넣었더니 맛있어졌다는 말에 겁도 없이, 엄마한테 검증도 하지 않고,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에 꿀을 주르르 투하하게 된다. 익어봐야 알겠지만, 꿀이 들어가서 그런가 때깔만은 그럴 듯 하고 뭔가 고급스러운 이 느낌 뭐지.


다음 날 남편 동료들의 집들이가 있어 야심차게 내놓았는데, 익으면 맛있을 것 같다는 유보적, 미온적, 인사치레적 반응이 돌아온다. 뭐야, 이 느낌 뭔가 익숙하다. 우리 딸더러 크면서 예뻐질 거라고, 얼굴은 크면서 열두 번도 더 바뀐다는 말 숱하게 들었지만 열두 살이 되도록 그 말을 듣고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물론 나는 내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ㅋ) 익으면 맛있다는 말은 단지 그저 그런 위로일 뿐인 말인가, 아니면 정말 명실상부한 꿀알타리로 거듭날 것인가 아직은 잘 모르지만 뒷집 할머니가 떠넘긴 알타리 덕에 한밤중에 난생처음 김치를 담그게 되었고, 꿀 알타리가 탄생되었다는 말씀을 주절주절하고 있다.


익어가는 중, 익으면 맛있어질 예정입니다.


1. 혹시 아나? 꿀알타리가 기절초풍하게 맛있어서 만들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나눠주다가 만들어 팔라는 주위의 성화에 알음알음 만들어 팔다가 어찌어찌 김치 사업이 번성하게 되고, 꿀알타리 브랜드 등록하고 특허 출원하고 홈쇼핑 완판에 해외로 수출하게 되면서 포브스에 비지니스 성공 비결을 인터뷰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몰라서 꿀알타리의 탄생의 시작을 기록해둔다ㅎ


2. 나머지 세 단의 행방이 궁금하실텐데, 세 단을 마저 김치를 담글까, 누굴 줄까 그러던 중에 동네 언니가 놀러와서 한참 수다를 떨고, 일어나려던 차에 알타리 김치를 담가야 하는데 바빠서 알타리를 못 샀다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할머니는 알타리를 못 산 언니가 우리 집에 커피 마시러 와서 푸념할 것을 미리 짐작하기라도 한 건가. 어머, 이건 언니에게 무료 증정해야 해! 만원을 준다는 걸 극구 말리고, 알타리를 차 트렁크에 실어보냄으로써 알타리 소동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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