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저장고 1 : 무지개
옆집 아저씨랑 어떤 아줌마, 옆집 아저씨 부인은 아니고 처음 보는 어떤 호리호리한 여자(줄여서 호리 아줌마라고 하자), 그리고 아빠랑 나랑 산책을 갔어. 우리 동네 뒷산 있잖아. 저어기. 늘 가던 곳인데 못 보던 계단이 있더라고. 나는 어쩐지 이상해서 안 가려고 하는데 호리 아줌마가 내려가 보자면서 나를 데리고 갔어. 옆집 아저씨랑 아빠는 뒤에서 따라온다고 했는데 잘 보이지 않더라고. 계단을 내려갔더니 넓은 강이 보이고, 나루터가 보이더라고. 그 앞에 허름한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어. 나는 호리 아줌마에게 말했어.
"우리 이 나무다리로 건너가나요?
"아니, 우리는 무지개다리를 만들어서 건너갈 거야."
무지개다리? 아무리 봐도 무지개다리는 없는데 호리 아줌마가 강 위로 걸어가기 시작했어. 그때 갑자기 빛이 나더니 진짜 무지개다리가 쫘악, 그것도 형광빛 무지개다리가 호리 아줌마 앞으로 펼쳐지더라고. 호리 아줌마는 그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으로 사라졌어. 나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무지개다리가 신기했지만 어쩐지 무서워서, 그냥 나무다리로 건너갔어. 근데 중간에 끊어져 있더라고. 다시 돌아가는데 아빠가 뒤따라와서 내 손을 잡았지.
"우리는 여기에서 그만 돌아가자."
“아, 난 강 건너가 궁금한데...”
아빠가 안 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발길을 되돌렸어.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그때 갑자기 내 앞에 웬 원숭이가 나타났지 뭐야.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어. 그냥 원숭이가 아니라 처키 같은 원숭이었어. 아빠! 아빠가 안 보이는 거 같아 두리번거리는데 뭔가가 나를 휙, 하고 휘감아서 쓰흡하고 빨아들였는데, 내가 물속에 빠져 있더라고. 아빠! 어푸, 어푸, 아빠! 난 수영 못하는데, 아빠는 안 보이고 대답도 없었어. 너무 무서웠어. 난 죽기 싫었어. 살고 싶었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갑자기 수영을 하기 시작했어. 수영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수영이 되더라고. 한참 수영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파랗게 보이는 거야. 내가 수영하는 곳은 강이 아니라 수영장이었어. 아, 살았구나, 싶었어. 근데 아니었어. 갑자기 처키 같은 원숭이가 또 나타났어. 입꼬리가 싸악 말려 올라간 사악한 미소로 웃고 있더라고. 날 봐! 이렇게! 어딜 도망가냐고. 넌 내 손바닥이라며, 원숭이가 나를 잡아당겼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잖아. 정신 차리고 있는 힘껏, 젖 먹던 힘으로 원숭이를 퍽퍽 퍽퍽 때렸지. 근데 소용없었어. 아무리 때려도 원숭이는 끄떡없었거든.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 거야. 팔다리에 모두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대로 가라앉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몸이 붕 뜨는 거야. 알고 보니 내가 문어로 변한 거였어. 문어는 다리가 여덟개잖아. 그 다리로 원숭이를 잡으려고 했지. 근데 갑자기 문어 다리가 딱딱해지더니 바나나로 변하는 거야. 원숭이는 키득거리며 바나나 다리를 하나씩 뜯어먹고, 나는 둥근 머리통만 남게 됐지. 그대로 둥둥 떠다니다 죽겠구나 싶었는데 누가 내 머리통을 잡아채서 물 밖으로 내동댕이쳤어.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난 사람으로 변했더라고.
나를 건져낸 건 어떤 꼬마 남자 앤 거 같더라고. 그 애 손에 먹물이 잔뜩 묻어 있었거든. 넌 누구...라고 물을 틈도 없이 갑자기 원숭이가 그 꼬마 애를 덮치려고 달려들었어. 꼬마 애는 먹물 묻은 손으로 원숭이 엉덩이를 찰싹하고 때렸어. 원숭이 엉덩이가 까매졌지. 원숭이가 까맣게 변한 엉덩이를 부여잡고 있는 사이 그 꼬마 애(먹물이라고 부르자)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고, 무지개 빛이 반짝거리더니 뾰뽀봉 귀여운 소리가 났어. 원숭이는 그 소리에 팔짝팔짝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픽, 하고 쓰러졌어.
"어... 어떻게 된 거야"
"원숭이를 퇴치했어. 뭐, 완벽하게 퇴치된 건 아니지만."
"완벽하게 퇴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네가 이 원숭이를 통째로 잡아먹어야 해. 그리고 그다음에 나온 똥을 이 끈으로 묶어서 물속으로 버려야 해!”
먹물 꼬마가 요괴를 잡는 끈이라며 빨간색 끈을 보여줬어. 마법의 끈이라고 하는데 그냥 선물 묶는 리본 같이 생겼더라고. 속으로 내 똥은 물컹한데 이걸로 어떻게 묶을 수 있는지 너무 궁금했어. 하지만 먼저 내가 원숭이를 통째로 먹어야 똥도 나오는데,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 그랬더니 먹물 꼬마가 자긴 급히 갈 데가 있다면서 원숭이는 집에 가서 구워 먹자며 책가방에 쓱 넣더라고. 나는 원숭이가 갑자기 깨서 도망갈까 봐 걱정이 되는데, 먹물 꼬마는 걱정 말라면서 어딜 서둘러 가더라고. 어디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렸어. 수영장 건너편에 어떤 애가 빠져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어. 먹물 꼬마가 자긴 쟤를 구하러 왔더면서, 그쪽으로 달려갔어. 수영장 근처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었어. 근데 물에 빠진 그 아이를 아무도 구하지 않고 있더라고. 내가 사람들한테 왜 이 아이를 구해주지 않냐고 따지니까 자기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내 눈에는 똑똑히 보이는데. 그 사이 먹물 꼬마가 그 아이를 구해주었지. 그 아이는 엉엉 울면서 말하더라고. 어차피 사람들이 날 봤더라도 구해주지 않았을 거라고. 자긴 왕따라고. 난 너무 화가 났어. 왜 그 아이를 구해주지 않는지. 나는 아이의 젖은 몸을 닦아주었고, 먹물 꼬마는 손에 묻은 먹물을 모아 따뜻한 코코아를 만들어주었지. 이제 울음이 그친 아이는 집으로 보내주었어.
먹물 꼬마가 갈 데가 있다면서 나더러 같이 가자더라고. 학교에 뭘 두고 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학교가 폐쇄되면서 못 가져온 게 있다면서. 우리 둘이 몰래 학교 교실에 가서 사물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총이 가득 있더라고. 근데 총이라고 하기엔 아주 작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알록달록한 장난감 총이었어. 속으로 이런 걸 가지고 놀다니 꼬마가 맞긴 맞네 생각했는데, 그게 악귀를 잡는 총이라고 하더라고. 평소엔 이렇게 작지만 악귀의 힘에 따라 총이 커지기도 한다는 거야. 그중에서 무지개 빛 총을 나한테 주더라고. 그러더니 너도 무지개 대원이 되지 않을래?라고 묻더라고. 나는 악귀는 잘 모르겠고, 무지개 빛 총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
-THE END(하지만 to be continued 될 것 같은 예감이...)
“엄마, 재미있는 얘기해줄까?” 딸은 꿈만 꾸면 나에게 들려준다. 사실 꿈을 듣기란 쉽지가 않다. 일단 출근할 때는 들어줄래야 들어줄 수가 없었다. 바쁜 아침 시간에 꿈 얘기하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일단 건성으로 흘려듣거나 짧게 끝나지 않으면 저녁에 들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꿈이라는 게 나중은 없다. 꿈에게 이불 밖은 위험하다. 저녁은 고사하고 이불 밖으로 나오면 꿈은 산산히 부서져 사라져 버린다. 지금은 나도 퇴사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고, 딸도 온라인 수업을 하기 때문에 아침 시간이 한층 여유롭다. 그래서 꿈을 잘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마음 먹어도 꿈이라는 게 원체 듣기가 힘들다. 꿈이라는 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인데, 듣도 보도 못한 배경에, 서사는 밑도 끝도 없는 전개에 뒤죽박죽이고, 엉뚱한 인물이 갑툭튀했다 존재감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그 복합적인 그림을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초등학생의 말로 풀어내려다 보니 따라가기가 굉장히 힘들다. 오늘도 인내심의 한계가 왔지만 꾹 참고 듣다보니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꿈이 무의식의 세계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현실의 관계, 경험, 생각, 고민, 걱정, 억압, 바람과 소망 등이 뒤섞여 있다. 오늘 꿈을 듣다 보니 부분적으로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 듣고 보니 딸이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 '보건교사 안은영',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 '주성치 서유기-모험의 시작'과 ‘월광보합’, 넷플릭스 다큐 ‘나의 문어 선생님’, 그리고 요즘 아빠랑 열심히 보고 있는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이 마구 섞여 있었다. 거기에 어제 줌 수업에서 아이들끼리 논쟁이 있었는데 그 논쟁에서 누군가의 강한 주장, 그로 인해 소외되고 상처 받은 아이에 대한 마음이 녹아있는 듯 했다. 일단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모르겠고, 너무나 생생하게 팔딱거리고 있는 딸 아이의 꿈이라서 일단 저장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