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저장고 2 : 공룡보다 더 무서운 할머니
“엄마, 이리 와봐!”
재미난 꿈을 꾸었나보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기대하며 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있잖아. 사실 오늘은 꿈을 안 꿨어."
"아, 그래? 아쉽네..."
"엄마가 그럴 거 같아서 옛날 꿈 들려주려고.”
“옛날?”
“응, 아주 옛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꿈이야."
엄마, 그 인디언 텐트 알지? 우리 어린이집 계단 아래에 있었던 거. (두 손 끝을 맞대고 입에서 미간까지 끌어 올리며) 이렇게 큰 꼬깔콘처럼 뾰족하게 생긴 거. 거기 안에 들어가서 혼자 책을 보고 있었거든. 그때 갑자기 텐트 안으로 뭐가 쑥 들어왔어. 길고 가느다란, 꼬리 같았더라고. 뱀인가? 도마뱀인가? 아니, 도마뱀이라고 하기엔 엄청 컸어.
공룡 꼬리였어. 내가 공룡에 한참 빠져 있을 때니까 잘 알지. 삐죽삐죽 삼각형 모양 있지. 그게 등에 솟아 있는 게 보이더라고. 너무 무서웠어. 숨이 멎는 거 같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 뭐, 공룡을 실제로 보고 싶기는 했지. 근데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그것도 이렇게 꼬리부터 보게 될 줄은 몰랐지. 그 큰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니 텐트가 와르르 무너졌고 난 그 아래 깔려서 정신을 잃었어.
머리가 깨지는 거 같았어. 누가 나를 막 흔들어대는 거 같더라고. 눈을 떠보니까 공룡이 나를 입에 물고 달려가고 있었어. 어찌나 빠르게 달리는지 머리가 달랑달랑 흔들려서 토할 거 같았지. 이러다 꿀꺽 먹히진 않을까, 잘못하다간 저 아래로 떨어져서 죽을 거 같더라고.
갑자기 멈춰섰어. 어떤 집 앞이었어. 노란 불이 켜져 있고, 음악소리도 들리는 거 같았고, 맛있는 냄새도 났어. 냄새를 맡으니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거리더라고. 배가 고팠지.
집안에는 공룡들이 바글바글했어. 그동안 그림책이랑 영화에서 봤던 공룡들 있잖아. 거기에 다 모여서 뭘 먹고 있더라고. 그 많은 공룡들이 나를 쳐다보는데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아주 이상했어.
카페 같은데 보면 아주 큰 테이블 있잖아. 나를 거기에 내려놨어. 공룡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쳐다보더라고. 침을 질질 흐르는 공룡도 있고, 입에 피가 줄줄 흐르는 공룡도 있었어. 이제 나를 잡아 먹으려는 건가? 이제 나는 죽는 건가. 벌벌 떨고 있는데, 공룡 사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앞치마를 한 할머니가 보이더라고.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야 하는데,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어. 할머니가 얼마나 무서운지 공룡보다 더 무섭더라니까. 한 손에는 번쩍이는 칼을 들고 있었거든. 난 이제 죽었구나 싶었지. 두 눈 질끈 감고 있는데, 할머니가 내 귀를 쭈욱 잡아댕겼어. 귀부터 잘라 먹는구나 싶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할머니가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더라고.
“요 녀석, 이제 그만 놀고 밥 먹어야지.”
앗! 이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린데. 눈을 떠보니 할머니는 이모였어. 어린이집에서 밥해주던 이모!
“엄마, 이거 처음 들어?”
“응? 난 첨 듣는데...”
“이거 내가 전에 얘기해준 거 잖아. 그것도 두 번이나!!!”
“아...그으래? 아...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 거 같아.”
라고 말했지만, 난 1도 기억 안 난다. 아주 어릴 때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꿈인데 어찌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할까, 궁금했는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꿈이라는 영상을 말로 풀어내고, 다시 한번 기억을 되살려 재생(각색)하면서 기억이 강화되고 머리 속에 아예 각인된 모양이었다. 추측해보면 출근 준비에 바빠 죽겠는 아침에 딸이 꿈 얘기를 해준다며 매달렸을 거고 아마 마지못해 건성으로 흘려 듣고 황급히 마무리했을 것이다. 다시 재생될 때도 역시 영혼없이 듣고 영혼 없는 리액션을 남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말한 딸의 기억은 더욱 강화되고, 건성으로 들은 나의 기억은 이토록 부실한 게 아닐까 싶다. 딸아이는 이토록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나는 그토록 듣는 게 귀찮았던 시간들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잘 들어보자, 잘 적어두자, 하는 마음으로 기록을 해본다(만 역시 듣는 건 참 어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