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는 언제까지 오게 될까?
이벤트 같은 거 질색팔색 하는 나도 딸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순진한 건지, 낭만적인 건지, 누구의 말마따나 선물을 받기 위한 고도의 전략인 건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인 딸은 아직 산타를 믿고 기다린다. 내가 아는 한 같은 나이 때에서, 최소한 우리 주변에서 가장 늦게까지 산타를 믿고 기다리는 중이다.
몇 해 전 북유럽으로 출장 갈 땐 산타 할아버지에게 전해달라며 편지를 써준 적도 있고(그 편지는 아직도 내 슈트 케이스 앞주머니에 고이 모셔져 있고), 산타 할아버지 밤늦게 고생하신다며 간식을 마련해놓고 잔 적도 있고, 혹시 못 들어올까 봐 한 겨울에 창문을 열어두고 잠들었다 감기든 적도 있고, 직접 만나보고 싶다며 잠을 안 자고 버티다 까무룩 잠이 든 적도 있다.
작년인가, 펑펑 울기도 했다. 산타의 진실을 폭로해버린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자긴 믿고 있는데 친구들이 자기의 믿음을 자꾸 깨려고 하고, 듣다 보니까 자기도 자꾸 의심이 든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주위의 숱한 방해(사실은 진실)에도 불구하고 딸은 산타는 믿는 아이들에게만 오는 거라며 외로운 믿음을 유지하고(하는 척하고, 하려고 애쓰고) 있다. 어릴 때 봤던 ‘폴라 익스프레스’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만약 이 모든 게 고도의 전략과 연기라면 딸은 연기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걸로 봐야 할 듯)
쓸데없는데 지나치게 똑소리 나는 딸이 산타만큼은 철떡 같이 믿고 있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우리는 기꺼이 산타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007 작전 버금가는 선물 구입 및 은닉, 새벽 배송, 그리고 능청스러운 발연기에 피땀 눈물이 흐릴 지경이다. 뭐,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몇 살까지 속고 속일 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재미 삼아 기록을 세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근데 이제 슬슬 귀찮고 버겁다. 아니 왜 딸의 선물은 왜 죄다 어려운가. 좋은 말로 유니크하고 창의적이다.
한 번은 탐험 노트를 갖고 싶다고 해서 그 비슷한 거라도 찾아보려고 교보문고부터 아마존까지 다 헤매고 다니다 결국 오천 원짜리 노트 사서 탐험 노트라고 써붙이고 꾸미느라 애먹었다. 한 번은 남자 바비인형을 갖고 싶다고 해서 당연히 대기업 마트에는 있겠지, 크리스마스 목전까지 미루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그 많은 인형 중에 남자 인형은 없었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죄다. 이때 적잖이 분개했지만 화는 나중이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남편이 인터넷에서 찾아 주문했는데 크리스마스 이틀 앞두고 품절이라는 연락을 받고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그래도 이 대한민국의 어미 아비는 자식을 위해선 어찌어찌 어려운 걸 해낸다. 벼락치기하면 시험 보고 다 까먹듯이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주 똥줄 탔던 기분만큼은 아직 생생하다.
뜨앗, 올해는 ‘드레스 폼’이란다. 혼잣말인듯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는데, 용케도 나는 그 주문을 접수했다. 패션 디자이너처럼 옷을 만들어 입힌다나 뭐라나. 그니까 거대한 인형 놀이되시겠다. 드레스 폼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런 걸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겠고(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한 친구가 성인숍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팔아도 비쌀 거 같아서 올해는 코로나 핑계로 스킵해볼까 슬쩍 찔러보았는데 지구 멸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 또 이 어미의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결국 크리스마스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선물을 마련해야 했다. 일단 시간을 벌자. 올해는 산타가 자가격리 끝내고 2주 뒤에 올지도 모른다고 해두고, 안전빵으로 딸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해두었다. 요즘 계속 집콕인 데다 책 택배 박스만 보면 환장하고 뜯어보는 딸이기에 편의점 픽업 택배라는 걸 난생처음 해보았다.(500원 할인된다ㅎ) 그다음 드레스 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비싸서 못 사주겠어서 포기하려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당근 마켓에 꽤 다양하게 나와 있었다. 좀 멀리 가야 하기에 퐁듀 치즈 사러 간다고 뻥 치고 나와서 드레스 폼을 픽업해서 차 트렁크에 숨겨두었다. 편의점 택배도 아이스크림 사러 간다며 픽업해오고, 미리 사두었던 포장지와 스카치 테이프도 트렁크에 숨겨두었다.
산타 마음도 모르고 딸은 늦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산타가 과연 올까, 어떤 선물을 가지고 올까, 너무 궁금하고 걱정되고 설렌다면서 몇 번씩 밖에 나갔다 왔다. 8년 만에 새 집으로 이사 와서 제대로 찾아오실지도 걱정되고 선물을 어디에 두고 가실지도 궁금하다고 했다. 새벽 1시까지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옷을 입은 채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정말 자는 건지 자는 연기를 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아 1시간쯤 더 기다리다가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가 들릴 때 주차장으로 나갔다. 그러니까 새벽 2시쯤 차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선물 포장하고, 선물 배달을 마칠 수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내년부터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내일 딸이 선물을 발견하고 얼마나 좋아할까, 그 표정 보자고 이짓하는 거지, 위로하면서 잠이 들었다.
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건 딸이 아니라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을 확인하고 딸을 흔들어 깨웠다.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나한테 이 어려운 선물 준비와 배달까지 맡겨 놓고 쿨쿨 자고 일어나 이렇게 눈치까지 없기야? 복화술로 욕을 하면서 빨리 다시 올라가 자라고 손짓 발짓해댔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우리가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 딸이 벌떡 일어나 달려가 선물을 끌어안고 세상 행복한 함박미소로 언박싱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드레스 폼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근데 남편이 그 새를 못 참고 트리 옆에 뭐가 더 있다면서 설레발을 떨었다. 으이그, 아예 다 말하시지. 꿀밤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딸은 드레스 폼을 들고 와서는 뭔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의심보다 즐거움이 앞선 나머지 더 캐묻지 않고 선물을 부둥켜안고 격하게 환영행사를 거행했다.
올해 크리스마스 작전도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 아빠의 설레발에 약간 눈치를 챈 듯, 믿음에 균열이 생긴 듯 하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크리스마스의 진실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어하는 그런 느낌? 나는 아이의 판타지를 깨고 싶지 않고 딸은 판타지를 향유할 권리를 가지는 어린이와 이별하고 싶지 않다. 눈치챈 것도 같은데 그냥 확 말해버릴까? 막상 그러자니 아쉽다. 귀찮다면서 나도 판타지 세계 구축을 즐겨왔나보다. 어차피 내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산타 놀이도 끝나는 거 같은데 1년만 참을까? 내년엔 또 어떤 창의적 선물을 주문할까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일단 푹 쉬자. 며칠간 참 고생했다. 나도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