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나의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님을 알면서도

엄마라는 혼란

by 무엇이든 씁니다

작년에 살짝 코로나 블루가 드리운 딸에게 슬램덩크를 쥐어주었다. 예상대로 슬램덩크의 매력에 훅 빨려 들어갔다. 슬램덩크 속 장면, 인물과 대사를 달달 외우고, 입만 열면 슬램덩크 얘기여서 한동안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과 같이 사는 느낌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농구에 대한 욕구는 만화책에 머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농구를 하겠다며 농구공을 사달라고 했다. 그것도 반짝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몇번 튕기다 애물단지가 될 게 뻔해서 선뜻 새 농구공을 사주기가 싫었다.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아서 당근 마켓에 키워드를 등록하고 싸고 좋은 농구공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미적거리는 중에 오랜만에 놀러 온 친구가 딸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금테 두른 스팔딩 골드를 쿠팡 새벽배송으로 보내주었다. 그날로 딸은 농구공을 들고 가까운 공원 농구 코트로 갔다. 혼자서 드리블 연습과 슛 연습을 했고, 주말엔 아침 일찍 남편과 나가서 농구 공 좀 튕기다 왔다. 가끔 시간 맞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농구를 하기도 했다. 개학한 후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남자아이들과 농구를 하다 왔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한참 야구에 빠져 아빠랑 야구장에 가고, 야구 모자와 유니폼을 사 입고, 야구 경기 다 챙겨보고, 자체 기록지를 만들어 야구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가 나중에 '야구기록원'이 되면 되겠다고 해서 진로까지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학교에서 남자아이들 사이에 껴서 야구를 하다가 남자아이들에게 구박받고(머리통을 많이 맞음), 맨몸으로 포수 하다 야구공에 맞아 온몸에 멍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야알못(야구 알지 못함, 남편과 딸이 나를 놀리는 말)인데, 딸은 야구를 저렇게 좋아하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짓궂은 남자아이들 틈바구니에서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때 얼마나 아쉽던지, 따로 야구 캠프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바쁘기도 하고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다시 공을 잡았다. 야구공에서 농구공으로 바뀌었다. 공을 바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농구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학교에 가서 운동장에서 실컷 뛰어노는 모습이 제일 좋았고, 농구 잘 하는 남자아이들 틈에서도 기죽지 않고 농구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공을 무서워해서 공놀이는 무조건 싫어하는 나와 달리 공에 진심인 모습이 좋았다. 나에게 볼 수 없었던, 그러나 하고 싶었던 그런 모습을 딸에게서 보니 좋았다.



그러다 다시 학교에서 남자아이들과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남자아이들의 거친 말들에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우는 모습 보이기 싫다면서. 이제 혼자서 아니면 아빠랑만 농구할 거라고 했다. 야구에 이어 농구도 그만둔다고 하니 너무 아쉬웠다. 그 아쉬운 마음에 남자 애들 말은 무시하라고도 했다가 남자애들한테 하지 말라고 경고하라고도 했다가, 너도 똑같이 하라고도 했다. 농구를 그만두는 게 너무 아쉬워서 어떻게든 이겨내고 계속 농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딸은 완강했다. 그런 말들을 견디면서까지 농구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긴, 농구를 왜 하는 건가? 재미있어서 하는 건데, 기분 나쁜 말들을 견디면서까지 농구를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딸에게 나의 욕구와 기대를 얹고,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자 했던 나의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운동을 못하니까, 딸아이가 남자아이들 사이에 껴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흐뭇하고, 나는 갈등이 싫어서 피하는 편이지만, 아이는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걸 보면 왠지 기특하고, 나는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지만, 아이가 리더십을 발휘하면 왠지 기특하다. 이건 아이가 아니라 순전히 내 마음이다. 아이가 싫어하고, 안 하겠다는 걸 강제로 시킬 정도로 적극적이거나 부지런하지는 않지만, 은연 중에 아이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포개고, 나의 기대를 아이의 어깨 위에 살짝 얹는 식으로 소소하고 은밀하게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아이는 내가 아닌데, 아이는 나의 자아실현의 도구가 아닌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와 나를 자꾸 혼동하고, 욕구와 감정이 뒤섞인다. 그래서 각별히 조심 또 조심하고, 노력 또 노력하면서 경계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농구 하고 싶으면, 농구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 내가 공 들고 나가서 농구하는 걸로~그러는 걸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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