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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0. 2020

어쩌다 집짓기

착공식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체 게으르고 느슨한 인간이다. 번거롭고 복잡한 일은 딱 질색이다. 오죽하면 결혼식도 귀찮아서 안 했던 내가 보통 사람들이 평생 한번 할까말까한 집을 짓게 되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남편에게 땅 얘기를 들은 게 지난 겨울이었다. 이듬해 봄에 땅을 사고, 한 여름에 설계를 하고, 가을에 인허가 과정을 거쳐, 하필 이 엄동설한에 착공식을 앞두고 있다. 말이 착공식이지 포클레인이 들어와 땅을 파기 전에 땅에 막걸리 한 잔 올리면서 안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착공식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우리만의 조촐한 의식이다.


비장하기도 했고, 심란하기도 했다. 왜 아니겠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다. 호호시탐탐 자유를 갈망하며 어느 날 훌쩍 떠날 수 있게 가볍게 살아야 한다며 부동산 같은 건 쳐다도 안 보던 나였다. 툭하면 이혼, 졸혼, 해혼을 들먹이며 남편과도 사네 마네 했던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집을 짓게 되다니! 인생 참 알 수 없다. 한 없이 가벼운 삶을 추구하다가 한 없이 무거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집 짓기 전까지는 내 인생 최대 대형 사고는 임신, 출산, 그리고 결혼이었다. 이제 여기에 집짓기가 추가되었다. 과연 잘하는 짓인지, 미친 짓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임신, 출산처럼 사고로 출발해서 내 인생 가장 잘 한 일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출산이나 집짓기나 뭔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일만은 틀림없으니 용기를 내보자. 


집 짓는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다양하다.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힘들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어떤 집이 될까? 생애 첫 주택을 우리 손으로 그리고 짓는다는 설렘도 분명히 있지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열 배 정도는 더 크다. 그 두려움 때문에 세레모니를 싫어하고, 미신 같은 건 건 취급하지 않던 내가 막걸리 병을 들고 땅에게 신고식을 올리고 있다. 


공사를 앞두고는 나도 별 수 없다.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겸손해진다. 이왕 천지신명님을 부르는 김에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하는 거창한 기도나 하다못해 '행복하게 잘 살게 해주세요'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기도들은 참 현실적이다. '좋은 날씨 좀 부탁드립니다', '부디 사고 없이 안전하게 끝나게 해 주세요', 그게 다다. 사실 겨울에 공사하는 입장에서는 진심을 담은 정말 간절한 기도다.


70평이 좀 안 되는 작은 땅이다. 그마저도 길로 빠지고, 주차장으로 빠지고 하면 딱 집 한 채 들어서면 끝나는 작은 땅뙈기다. 몇 걸음이면 되는 땅을 한 발 한 발 정성스럽고 느리게 밟아가며 걸었다. 몇 번씩 그렸다 지우고 또다시 그렸던 평면도를 떠올렸다. 이 땅에 집이 생긴단 말이지. 


이미 엎질러진 막걸리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집 지을 땅의 모습(201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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