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4. 2020

경계

말뚝을 박다

내 인생 책 리스트에는 '경계(Boundaries, 저자 Henry Cloud, 2004)'라는 책이 있다. 나의 한계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때 친구가 권했다.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영문으로 읽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경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히 깨달았다.


경계는 피아의 구분이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다. 나를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경계는 중요하다. 서로의 경계를 알고,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서로 어울려 살 수 있다. 경계가 분명해야 오히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가 가능하다. 알고 보면 많은 다툼들은 경계 침범되었을 때 일어난다.


집 짓기도 경계에서 시작된다. 땅을 사고 가장 먼저 하는 것도 측량이다. 내 땅과 남의 땅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고, 이웃들에게 확인받기 위해 지적측량이라는 걸 한다. 집 짓는 동안 경계(복원) 측량, 현황측량, 분할측량까지 총 세 번의 지적측량을 해야 한다. 우리는 땅을 사자마자 경계측량을 했다. 이웃집과 우리 땅의 정확한 경계를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들어보니 우리 땅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웃집 땅이었다든지, 남의 집 건물이 우리 땅에 넘어와 있는 경우도 왕왕 있다.


측량 결과 우리 땅의 경계도 뒤섞여 있었다. 고양이 할머니네 마당 안쪽으로 우리 땅의 경계가 확인됐고, 징크 사장님네 수로에서 우리 땅의 경계가 확인됐다. 예전에는 측량 기술이 정확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많았을 것 같다. 우리 땅에 남의 건물이 들어와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번에 측량을 하면서 세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측량할 때는 우리 땅과 경계에 있는 이웃들이 다 나온다(나오게 해야 한다). 서로 경계를 확인해야 훗날 분쟁의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미리 측량 날짜를 알려드리고 꼭 참석하도록 요청한다. 우리 땅과 맞닿아 있는 이웃은 탤런트 김ㅇㅇ을 조카로 둔 징크 사장님(남동쪽), 고양이를 보살피는 옆집 고양이 할머니(동서 쪽), 백구를 키우는 빨간 지붕 집 할머니(북서쪽), 시집올 때 밤나무를 심은 과수원집 할머니(북동쪽)까지 총 네 집이다. 재밌는 것은 경계복원 측량을 할 때 현재 땅 주인만 나오는 게 아니라 미래 상속자이자 재산권자인 아들딸들이 우르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빨간 말뚝이 진짜 등장한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만 보고도 절한다'는 그 말뚝! '군대에 아예 말뚝 박아라' 할 때 그 말뚝! '말뚝박기' 할 때 그 말뚝은 상징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 실체가 현존하는 물건이었다. 측량을 하면서 지적 경계점마다 빨간 말뚝을 꽂는다. 측량 성과도를 보니 땅 모양이 꺾이는 꼭짓점에 총 17개의 말뚝이 꽂혀 있었다. 옛날에는 그 말뚝을 슬쩍 옮기기도 하고 훼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경계 침범 죄로 처벌받는다.


이번에 측량 성과도를 보면서 우리 땅이 지구단위계획상으로 베라 산 취락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동네에서 국사봉이라고 부르던 뒷산의 진짜 이름은 베라산이고, 그 최고봉이 국사봉이다. '베라산'이라는 이름이 특이하여 유래를 찾아보니 순 우리말로 '별이 비단같이 펼쳐져 있는 아래 산'이라는 뜻이었다. 한자로는 '성라산'이었는데, 별 아래산이라는 발음이 변형되어 베라 산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 '별 아래산'을 빨리 발음하다 보면 '베라산'이 된다. 별이 얼마나 많았길래 그런 이름이 붙은 건지, 집을 지으면 별부터 봐야겠다.


경계점에 꽂힌 빨간 막대기가 측량 말뚝이다(2019.6.11)


측량하는 날 우리 세 가구를 대표했던 2호 집 B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더 물고 왔다. 고양이 할머니 따님은 미용실을 하고 있고 싱글이며, 뒷집 과수원 할머니네 아들은 동네에서 소갈비 집을 하고, 지금 과수원 자리에 카페도 짓고 있다고 했다. 그중 미용실을 하는 고양이 할머니 따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들어보니 고양이 할머니와 징크 사장님 간 땅의 경계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했다. 집을 지으면 모두 철학자가 되고 명언을 남기게 되는 것일까? 앞으로 우리 집을 지어줄 자칭 개념 업자 B는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든다는 제법 그럴듯한 명언을 남겼다. 좋은 말 하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서 속으로 삼키고 말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혼자서만 했다. 측량이 끝나고 빨간 지붕 집(장차 우리 뒷집이 될) 할머니가 마당에 있는 앵두를 나무 가치채 꺾어 주셨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앵두였지만, 일단 환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에 알게 된 건축용어

1. 경계복원측량 : 토지에 대한 정확한 경계를 지표상에서 확인 말뚝 등으로 표시, 향후 이웃끼리 토지분쟁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음으로 토지에 인접한 토지주와 함께 확인해야 함

2. 현황측량 : 토지에 있는 구조물(담장, 도로, 축대 등)이나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여 지적도에 표시

3. 분할측량 : 한 필지를 두 필지 이상으로 나눌 때 실시, 우리는 하나의 필지로 된 토지를 공동 매수하여 3개의 필지로 분할


이전 02화 뚝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