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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3. 2020

뚝심

하고 싶은 마음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긴다

괜찮은 땅이 나왔대.


또 시작이다. 갖은 구박과 무시에도 죽지도 않도 또 왔다. 우리가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만 8년 동안 땅 사서 집 짓고 싶다는 얘기가 대여섯 번 정도 나왔다.


시작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동네에 이사 와서 사귀게 된 절친이 우리 집 가까이 땅을 사서 집을 짓게 되었다. 그즈음 친구 가족이 전세 들어 살던 집을 집 주인이 리모델링하면서 한 달간 집을 비워야 했고, 그 사정을 알게 된 우리는 우리 집 2층에서 지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우리 세 식구, 친구 가족 네 식구, 총 일곱 명이 함께 살았다. 그 기간에 친구 가족은 새 집 설계에 들어가면서 어깨 너머로 구경하던 남편이 자연스럽게 설계과정에 참여(?)했다. 퇴근이 늦었던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맥주 캔과 함께 설계도가 거실에 펼쳐져 있었다. 남편은 구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집 짓는 것보다 더 열심히 설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공사 중에는 퇴근만 하면 집이 아니라 친구 집 짓는 현장으로 직행하곤 했다. 남편은 집에 진심이었다.


두 가족이 한 달간 함께 살았던 2층 집


그게 화근이었다. 집 짓기의 재미를 알아버린 것이다. 그때 바람이 잔뜩 들어가고 말았다.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수시로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땅을 보러 다녔다.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이 남편에게 '좋은 땅 없어요?'라고 묻는 지경이 되었다. 남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전염병이 돌듯 주위에 집 짓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큰 땅을 사서 같이 지어 살자고 초대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었다. 아무나 초대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집 짓기는커녕 집을 살 생각도, 그 비슷한 시도도 해본 적이 없다. 남편이 집 얘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오죽하면 영끌이라는 말이 있을까. 영혼까지 끌어다가 집을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한 곳에 꽤 오래 살고 있지만,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위 부동(不動)산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살 돈도 없었다.ㅎㅎ) 하지만 나의 반대만큼이나 집을 짓고자 하는 남편의 의지도 확고했다. 집 짓기에 대한 남편의 욕망은 꾸준히 자가발전을 했다.  



8년째 살고 있는 집,  담쟁이넝쿨 집이라고 부른다(2019.4월 말 우리 집 풍경)



나 집 짓고 싶어!


한동안 뜸하다가 땅 얘기, 집 얘기가 또 나왔다. 200평이라고 했다. 혼자 사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와 가격이었다. 땅을 먼저 보고 온 친구가 우리에게 같이 사서 집을 짓자고 했다. 난 당연히 거절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남편은 벌써 땅을 보고 오셨고, 그들과 매일 비밀회동(?)을 하면서 작당모의를 하고 있었다. 일이 무르익었을 때쯤 남편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듣기만 해도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이미 두 가족은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고, 나를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그들은 공동행동을 개시했다. 수시로 우리 집에 쳐들어왔고,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나의 냉랭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았다. 나름 끈기와 근성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남편에겐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지만, 우리 가족에게 애정을 갖고 성의를 보이는 친구들이었기에 성의 있는 거절이 필요했다.


우선 돈 핑계를 댔다. 집을 지으려면 빚을 내야 했다. 나는 영끌하여 집을 짓고, 평생 빚을 갚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다음은 딸내미 핑계를 댔다. 지금 다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싶다고 했다. 집을 지을 땅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걸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한마디로 집 지을 마음 1도 없다.


내가 무슨 핑계와 이유를 대건 그들은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나만의 착각이었는지 몰라도, 그때는 해도 별도 달도 따줄 기세였다. 세 가족 중 건축시공을 업으로 하는 분이 있어서 어떻게든 땅만 사면, 지금 살고 있는 전세금으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집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사탕발림에 넘어갈 내가 아니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내 마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밤 잠을 설쳤고, 어느 날은 악몽도 꾸었다. 집을 짓던 안 짓던 빨리 결정하고 편하게 자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철학을 가지고 있고,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엄마가 나를 말려줄 거라 믿고 전화했다.


그렇게 소원이라는데 한 번 해보지 그래?"


엄마의 말에 온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 말을 잘 듣는 딸도 아니면서, 왜 이번만은 엄마 말을 듣겠다고 생각한 건지 알 수 없다. 질색팔색 하던 일이 기어이 현실이 되기 직전이다. 일이 되려면 엉뚱하게 되기도 한다. 남편의 뚝심, 친구들의 끈기, 엄마의 지지에 힘입어 집을 짓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두 다리 쭉 뻗고 세상 달콤한 꿀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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