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베리가 어때서
그릇만 보면 요리 전문가 같아.
친구들이 내 그릇들을 보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브랜드는 거의 없고 그냥 어중이떠중이 사고 모은 그릇이 많긴 하다. 이렇게 다양한 그릇들은 별 대단한 반찬 없이 손님을 대접할 때 꽤 유용하다.
그릇은 식문화를 반영한다. 우리에게 사발, 대접, 접시, 종지 등이 있듯이 서양 문화권은 크게 플레이트(plate)와 볼(bowl)로 나뉘는 것 같다. 나는 플레이트보다는 볼 종류를 좋아한다. 시리얼 볼, 숲볼, 샐러드 볼, 파스타 볼, 라이스 볼, 딥볼, 디저트 볼, 캔디 볼... 이런 것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애정 하는 것이 베리 볼이었다.
내가 디저트로 과일을 먹겠다고 했을 때 같이 살던 미국 친구들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들에게 과일은 오히려 스타터 쪽에 가깝고 디저트로는 주로 쿠키, 케이크, 아이스크림, 파이, 푸딩 같은 달달 구리를 먹었다. 과일을 먹더라도 그냥 생으로 먹지 않고 딸기를 생크림이나 초콜릿에 푹 찍어서, 사과를 캐러멜에 찍어먹는 모습을 봤을 때 내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왜 저 맛있는 과일에 왜 테러를 하지... 그런 기분... 컬처 쇼크였다.
지금은 디저트 카페가 널리 유행하고 나 역시 지금은 달달 구리를 디저트로 먹지만 그때만 해도 디저트로는 그냥 아무것도 찍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생 과일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디저트 플레이트를 들고 달달 구리를 먹을 때 나는 베리 볼을 들고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블루베리, 블랙베리를 수북이 담아서 흡입하곤 했다. 그들의 베리들은 왜 그리 크고 단지, 베리에 푹 빠져 살았다.
그렇게 늘 나의 디저트를 책임져 준 베리 볼을 하나 챙겨 올 걸, 그땐 그런 생각을 못 했다. 베리만 보면 귀염 뽀짝 한 베리 볼이 생각나곤 했다. 그러던 차에 당근 마켓에 베리 볼이 떴다. made in england 다운 클래식한 장미에, 물결 엣지에 금장이 딱 내 취향이었다. 바로 예약하고 달려갔다. 손바닥만 한 베리 볼을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정성스럽게 들고 있는 그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신호등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베리 볼?
네! 베리 볼!
한동안 쓸 일이 없었다. 가끔 잼이나 버터를 담는 데 쓰기도 했는데 베리 볼에 질척하고 모양이 들쑥날쑥한 것들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역시 베리 볼엔 베리를 담아야 한다. 베리가 익어가기만을 기다렸다. 딸기가 익고, 코리안 베리 앵두와 보리수가 익어가고, 산딸기 꽃이 막 지고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는 요즘 베리 볼의 시즌이다. 매일 산책 나갈 때마다 앵두 한 줌을 따서 베리 볼에 담아 둔다. 그게 몇 알이던 베리 볼은 정성스럽게 감싸 안는다. 베리 볼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딸은 앵두가 시다면서 잘 안 먹고, 남편은 앵두가 효율이 떨어져서(과육은 별로 없고 몸체에 비해 큰 씨앗) 안 먹는 듯하고 모든 앵두는 내 차지다. 그렇게 베리 볼은 6월 식탁의 센터피스가 되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