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는 살아있다
밤새 빗물을 잔뜩 흡수한 식물들이 더 진한 초록, 더 진한 밤색이 되어있다. 그 사이에 뭔가 특별하게 반짝거리는 게 있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었다고 생각한 배롱나무가 겨우 겨우 살아남아 새순을 낸 것이다. 짜잔, 죽은 줄 알았지?
우리가 기다리고, 애태우고, 체념하고, 다시 희망하다가 다시 포기했던 나무에 새순을 보자 울컥했다. 아직 잎을 활짝 펼치지 전이라 조심스러웠지만 분명히 새 생명이었다. 아기가 엄마의 좁은 경도를 빠져나와 아직 눈을 못 뜨고 이 세상 공기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썰미 좋은 남편이지만 바쁜 아침에 못 보고 지나쳤을 거 같아서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이야!라는 짧지만 깊은 감탄사가 돌아왔다.
이사오자마자 뒷집 할머니의 배롱나무를 보고 우리도 배롱나무를 심자고 했었다. 작년 가을 놀러 온 친구에게 배롱나무를 사달라고 해서 심은 배롱나무였다. 지난달, 뒷켠에서 만난 할머니가 배롱나무가 얼어 죽었다며 사형선고를 내렸었다. 그때 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다. 나의 간절함 때문은 아니겠지만 반쪽은 살아남았고, 지금은 잎이 무성해지고 있는 중이다. 곧 붉은 꽃이 피겠지.
우리 배롱나무에는 그렇게 간절하지 못했다. 주로 따뜻한 남쪽에 심는 나무인데 괜히 욕심을 부렸네, 볕 잘 드는 자리로 옮겼는데 괜히 옮겨 심었네, 월동준비를 잘해주었어야 했는데 소홀했네, 그저 후회 투성이었다. 나무 사준 친구 보기 미안해서 어쩌지, 새순이 돋지 않아 연락도 못하고 있었다. 남편이랑 저 자리에 뭘 심네 마네 하면서 빠르게 다른 대안을 찾고 싶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전문가에게 최후 진단을 받아보고 싶어서 자주 가는 동네 농원 사장님께 여쭈어보았다.
__배롱나무가 지금까지 새순이 안 나면 죽은 거지요?
__아니요. 조금 더 기다려보세요. 나뭇가지는 죽었어도 나무줄기는 살아있을 수도 있어요. 나무줄기를 이렇게 손톱으로 살짝 긁어보세요. (시범) 보세요! 여기가 초록색이면 아직 죽지 않은 거예요. 뒤늦게라도 새순이 돋을 수 있어요.
그렇게 나무줄기에서 초록을 보았고, 그 후로도 한 달 남짓 흘렀다. 6월이 되자 사실상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그냥 뽑아버리지만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이렇게 살아났다. 아니 죽은 적이 없다. 그 큰 추위와 폭설에도 기어코 살아남아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득하게 나무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낙심하고, 체념하고, 포기하던 시간들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살아있음은 이렇게 감동이구나. 살아있는 배롱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얼마 전 우리 집에 다녀간 한 친구가 생각났다. 1년 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을 겪어낸 친구에게 따뜻한 밥 한 끼 해주려고 집에 불렀다. 그 사건은 까맣게 잊고 몇 년 전 함께 일하던 모습처럼 웃는 낯으로 시시컬렁한 농담도 하고 신변잡기를 늘어놓으며 사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서울로 가기 전에 신선한 바람이나 쐬어주러 데리고 간 동네 뒷산에서 친구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죽고 싶다고 했다. 너무 힘들었을, 그리고 현재 진행형으로 힘든 친구를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마땅한 말들이 생각나지 않아서 같이 주저앉아 울었다. 그리고는 겨우 튀어나온 한 마디는
우리 살아있자. 살아서 이렇게 또 보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