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라는 존재
블랙 위도우를 봤다. 남편과 딸은 마블 영화가 나오면 개봉날 꼭 챙겨보는 오랜 마블 팬이지만 나에겐 첫 마블 영화다.
히어로물은 내 취향이 아니어서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마블에 입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에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팬심을 앞세워 함께 보러 가겠다고 나섰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스칼렛 요한슨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her, 결혼 이야기에 나오는 그녀)
결론부터 말하면 '재밌다'. 큰 스케일 속에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감정도 있어 오락영화로 훌륭했다. 너무 별일 없이 집콕하며 지내온 일상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마틴 스콜세지가 그랬다지. 마블은 영화가 아니라 테마파크 같다고. 역시 거장의 눈은 정확하구나. 영화가 끝났을 때 정말 거대한 테마파크에 들어갔다 온 기분이었다.
순전히 딸 때문이다. 마블을 이야기할 때 동공이 커지고,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어깨가 들썩거리면서 뭔가 희열과 경이로움에 가득 찬 딸을 보면서 도대체 마블이 뭐길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 몇 년 전 로마로 가는 비행기에서 자고 있었다. 누가 큰 소리로 훌쩍훌쩍 우는 소리에 깨 보니 딸이었다. 벌떡 일어나 왜 그래? 그랬더니, 영화가 너무 슬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영환데?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였다. 충격이었다. 저런 영화 보고 운다고? 그것도 다들 자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훌쩍훌쩍 소리 내면서!!! 처음 보는 영화도 아니고, 두 번째 보는 거라고 했다.
딸을 울고 웃게 만드는 놈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과 그래도 ‘딸이 보는 게 뭔지는 알아야지, 하는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지금까지는 부모로서 부지런함보다는 나의 귀차니즘이 승리 중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위기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마블과 야구, 음악 등으로 강력한 교집합을 형성하고 나날이 취향 공동체로 발전하는 부녀의 많은 대화에서 나는 점점 소외되고 있었다. 가뜩이나 팬데믹 상황에서 단조로운 일상인데, 자기들끼리만 재미있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구경꾼 신세에서 벗어나 전격 그 대열에 합류했다.
딸이란 존재는 뭔가? 딸 때문에 안 하던 짓 참 많이 한다. 좋은 말로 하면 딸은 취향과 관계와 세계관을 확장시킨다. 딸이 아니었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에 관심을 갖고 발을 들여놓게 한다. 다른 마블 영화를 안 본 상태에서도 블랙 위도우는 충분히 독립적이어서 재미있게 보았지만, 딸은 내가 영화의 반의 반도 이해를 못했을 거라며 지금부터 마블 정주행을 하고 주문한다. 스무 편도 넘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더니 그러면 어벤저스 시리즈만이라도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마블 유니버스에 대해서 함께 대화할 수 있다고 했다. 귀차니즘과 호기심(오기)이 동시에 꿈틀댄다. 여기서 그만 손절해야 할지, 지금부터 마블 영화 정주행하고 마블 유니버스의 일원이 돼야 할지, 이것이 요즘 내가 하는 (행복한) 고민이다.
그나저나 인사는 해야지! 블랙 위도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