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가고 싶어요

원격수업의 악몽

by 무엇이든 씁니다

지난주 금요일 원격 수업이 결정된 날, 딸아이는 모든 교과서를 싸들고 집에 돌아왔다. 학교 갈 때는 분명히 웃상이었는데 울상이 되어 돌아왔다. 딸이 다니는 학교는 작은 학교라서 지금까지 매일 등교를 했다. 다른 큰 학교들은 매일 등교를 못했는데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학교 다닌 게 어디냐고, 이제 곧 방학이니까 조금만 참아보자고 다독였지만 큰 위로가 된 것 같지 않다.


갈증이 심할 때 벌컥벌컥 들이켜는 물의 맛이 얼마나 꿀맛인지 알 것이다. 딸에게 학교가 딱 그랬다. 딸은 작년의 묵은 갈증까지 모두 해소할 기세로 학교의 모든 것을 흡수했다. 아침에 학교에 가는 발걸음은 세상 가벼웠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얼굴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물이 오른 나무처럼 싱그럽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팔딱거렸다. 어린이로 초등학교 마지막 해이기도 해서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듯 작년과 비교하면 올해는 천국과 같은 날들이었다.


작년엔 너무 힘들었다. 1년 내내 온라인 클래스(온클)를 하면서 딸은 코로나 블루 증상을 보였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둥, 삶의 의미가 없다는 둥 그런 부정적인 말들을 잔뜩 늘어놓아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당시에는 그런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허둥지둥했는데 나중에 뒤돌아보니 가벼운 우울증 같은 거였다.


좋아하는 걸 못하면 병이 난다. 학교를 좋아하는 딸이 학교에 못 가니 병이 난 것이다. 피아노 개인 레슨 말고는 다른 학원이 전무한 딸에게 학교는 학습과 관계의 유일한 중심이다. 딸은 외향적인 성격으로 사회적 관계와 상호 작용, 다층적인 소통을 통해 삶의 에너지와 의미를 얻는다. 그런데 학교를 못 가니 한참 꽃 피워야 할 것들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루틴이 깨지고 멘탈이 흔들렸다. 학습은 그런대로 따라갔지만 관계의 목마름은 온라인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친구들과 따로 약속해서 서로의 집에 오가긴 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약속을 잡기 위해 부모가 개입되는 일도 번거롭고, 그렇게 한 번은 단선적이고 단발적인 이벤트일 뿐이었다. 매일 학교에 가면서 일상적인 시공간에서 연속적이고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관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친구 만나러 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됐고, 학원이라도 보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지난 1년 원격 수업의 결과 학습과 사회성에 있어 심한 격차와 결손을 보였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주위 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우리 모두 학교의 존재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다. 학교 교육에 문제의식은 여전히 많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필요하다. 학교가 학습과 돌봄, 관계의 베이스캠프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따라 아이들의 격차는 심화되는 것은 오랜 일이지만 학교에 안 가면서 그 격차는 더 극단적으로 벌어졌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나마 집에서 아이의 투정도 받아주고, 밥도 해주면서 아쉬운 대로 친구 역할도, 보조적인 선생님 역할도 해주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당장의 해법은 전면 등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사회적으로 그런 우려와 권고가 많아지면서 올해는 등교가 시작됐다. 학교에 가자 그간의 모든 고민과 고충이 사라졌고, 아이들의 관계도 훨씬 넓고 깊어졌다. 그런 중에 다시 원격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작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하루 이틀 사이에 딸의 루틴이 흔들리고, 투덜거리고, 짜증이 잦아졌다. 온클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대단했다. 그런 딸을 지켜보자니 나는 나대로 힘들고 답답하고 지친다.


온클에 무난히 적응하는 아이들도 있고, 심지어 더 좋아하는 아이들도 아주 소수지만 있다. 하지만 딸의 원픽은 학교이고, 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딸이 학교에 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한편 냉정하게 생각하면 딸이 팬데믹 상황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이 현명한 길인지도 모른다. 이 상황이 하루아침에 끝날 것은 아니고,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는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고 막막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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