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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17. 2020

우리는 좀 불편하기로 했다

같이 산다는 것


공사 하기에 앞서 동네 주민들에게 귤 한 박스씩 돌리기로 했다. 동네에 공사차량이 왔다 갔다 하면 주민들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미리 찾아 뵙고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편이 싱싱한 귤을 사겠다고 아침 일찍 시장 가서 귤을 사왔다. 온 식구가 함께 가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와서 가구별로 한 명씩만 갔다. 그런데 일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집에 사람이 없어 명함과 함께 귤 박스를 현관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현장 소장에게 이런 문자가 도착했다고 했다.

 

공사 전 동네 이웃들에게 돌리려고 산 귤박스


늦게 집에 와서 보니 집 앞에 귤 박스가 있네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히 먹겠습니다. 한 동네 한 식구가 돼서 반갑습니다. 예쁘게 집 지어서 우리 동네 더 환하게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해요.


문자의 주인공은 며칠 전 만났던 동네 아저씨였다. 얼마 전 동네를 지나다 집터에 잠깐 들렀는데 마침 차를 빼러 나왔던 아저씨와 만나 인사를 나눴다. 아저씨는 먼저 집을 짓고 이사온 선배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저씨도 우리처럼 1년 전 같은 교회에 다니는 세 가족과 함께 나란히 집을 지었다. 아저씨가 건축설계사여서 집짓기를 주도하고 설계도 직접 하셨다고 했다. 아저씨가 해주신 동네 이야기 중에는 이미 들어 알고 있던 것도 있었고, 새로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좋은 이야기도 있고, 안 좋은 이야기도 있었다. 오히려 덕담 일색이 아니라서 아저씨의 이야기에 더 믿음이 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이거였다.


같이 집 짓고 살면 엄청 재밌을 거 같죠? 결론만 얘기하면 엄청 불편해요.


나는 '그래요?' 하고 웃었다. 집을 짓고 어울려 살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신경이 쓰이는 일이 많다고 했다.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점에서 난 걱정이 없었다. 우리는 이미 찐하게 담금질과 벼름질을 해가면서 단련이 되었다. 같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내고, 지금 작은 혁신학교를 보내면서 한 동네에서 8년 넘게 살아왔다. 마을을 이루고 더불어 산다고 반드시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운하고, 오해하고, 감정이 상하고 관계가 틀어지는 일들이 꽤 있다. 하지만 사과하고, 화해하면서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간다. 말 그대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인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맞는 건가? 고민도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기를 선택했다. 함께 사는 것의 불편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 아이를 키울 땐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이 이점들이 대단히 많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주위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예전에 아이를 많이 낳아도 키울 수 있었던 건 가족 공동체, 마을 공동체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돌봄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동네에서 비슷한 사회적 경험을 했다. 우리 아이를 다른 집에 맡기기도 하고, 다른 집 아이를 내가 봐주기도 하면서 서로 민폐를 끼치기도 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유년기를 잘 보낼 수 있었다.   


우리 아이는 외동딸이어서 유사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보통 형제 안에서 싸우고 화해하면서 양보하는 법, 욕구 조절하는 법, 협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우리 아이는 그런 기회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식구를 더 늘릴 생각은 더더욱 없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다. 딸아이는 멀리 사는 진짜 사촌보다도 더 가까운 동네 언니, 오빠, 친구, 동생이 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놀면서 지내는 경험이 그 어떤 공부보다도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곧 다가올 사춘기에는 다 부질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파트라면 모를까 우리처럼 한적한 곳에 지을 지을 땐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좋다. 방범상 문제도 그렇고,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망치가 필요하면 빌리러 가고, 여행가면서 반려동물도 부탁할 수 있다.


그런 삶이 공짜일리 없다. 내가 도움을 받으면, 나도 언젠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프라이버시는 포기해야 한다. 가끔 불쑥 찾아오는 이웃들도 편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아저씨가 건축가로서, 또 집을 먼저 지어보고 살아본 경험자로서 팁을 하나 주시겠다고 했다. 공동 마당 외에 작더라도 가족만의 공간을 꼭 만들라고 했다. 함께 살수록 자기만의 아늑한 공간과 경계가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좀 편해졌나. 초면에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어떤 창호를 하셨는지 여쭤본 것이다. 건축가시니 좋은 걸로 했겠지, 했던 내 예상과 달리 중급의 브랜드 창호를 하셨다고 했다.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으로 이사 오는 거여서 같이 집 짓는 분들이 최상급의 창호로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가 설득해서 중급 창호로 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예산에 맞춰서 했어요. 좋은 걸로 하면 그만큼 좋겠죠. 하지만 중급도 나쁘지 않아요. 좀 바람도 들어오고 해야죠.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 살려면 아파트 살죠. 왜 여기 살겠어요. 주택에 산다는 것은 불편한 것도 좀 있고 그런 거지요.


나는 격하게 동의했다. 우리 상황에서 꼭 필요한 말이었다. 주택에 산다는 것,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은 매우 불편할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이기도 하다.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세수도 안 하고 안 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이웃집 아저씨도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초면인데도 이웃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생각이 비슷해서 그런가, 세수 안 한 얼굴이 그렇게 민망하지 않았다. 마을에 살면 세수 안 하고,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다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은 일상이기에, 이런 부끄러움은 상실한지 오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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