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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20. 2020

보이지 않게 사랑할 거야

집을 비우겠습니다

건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라고들 한다. 빈 땅에 건물을 짓는 거니까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을 설계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보이드(void)다. 건물의 로비나 중정이 대표적인 보이드 공간이다.


집을 지으면 보이드를 꼭 두고 싶었다. 폐소 공포증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비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답답하고 힘들다. 비좁은 공간보다 더 싫어하는 게 낮은 천장이다. 천장이 낮으면, 내가 납작해지는 것 같다. 넓고 낮은 것과 좁고 높은 것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집을 짓다 보면 높이보다 넓이에 집착하게 된다. 집을 짓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몇 평짜리 집이냐고 묻는다. 아파트가 일반적인 우리 주거문화에서 집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평수인 탓이다. 나는 우리 세 식구에 30평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계를 하면 할수록 넓이에 집착하고 있었다. 설계를 하다 보면 필요한 게 자꾸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트에 가면 필요 이상 많은 것을 사게 되는 것과 같은 심리다. 예산이라는 제약 조건이 아니었다면 최대한 넓혔을지도 모르겠다. 예산 때문에 최대 면적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간 곳이 바로 보이드라는 공간이다. 보이드는 집의 면적을 넘어 집의 체적과 부피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보이드는 위아래가 서로 트여 있어서 소통을 촉진한다. 단점은 프라이버시에 약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1층은 공적 공간, 2층은 사적 공간으로 분리해놓아도 보이드를 통해서 경계가 뒤섞일 수밖에 없고, 에너지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프라이버시보다 소통을, 면적보다 높이를, 효율성보다 효과성을 선택했다. 


평면도 상 보이드__평면도에서 중앙에 X 표시되어있는 곳이 보이드(void) 공간이다.
모형에서 보이드__가운데 뻥 뚫린 공간이 보이드(void) 공간
공사 중 보이드__계단과 함께 드러난 보이드



보이드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도 내 마음은 수시로 흔들렸다. 큰 면적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호시탐탐 나를 파고들었다. 보이드는 설계도면 상에 X로 표시되는데 나 같이 공간 지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그 X를 입체적으로 상상하기가 어렵다. 보이지가 않으니까 불안하고, 그 불안한 틈을 파고들어 유혹한다. 거실 보이드 공간에 슬라브를 치면 1~2평 남짓 작은 거실이 생기고, 다이닝룸 천장에 슬라브를 치면 2~3평 남짓 작은 서재가 생긴다고 속삭였다. 실용주의자인 현장 소장님도 적극 거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수시로 다퉜다.


우리 집에서 열린 하우스콘서트


몇 날 며칠 고민한 끝에 우리는 비우기로 했다. 지금 있는 공간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비울 때다. 공간도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그러면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지켜낸 보이드 공간에 피아노를 둘 생각이다. 일요일 아침, 보이드 공간으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고, 딸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빈 공간을 채울 것이고, 나는 2층에서 뒹굴거리며 딸의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보이드 공간을 사수하고, 보이지 않게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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