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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an 21. 2020

백년손님이 될 사람

선을 넘는 건축가

현장에 왔는데 혹시 이쪽에 계시면 밥 같이 먹으려고요.


우리 집 설계를 하신 정 소장님이 현장을 보러 오셨다가 전화하셨다. 못 뵌 지 한참 되어 버선발로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난 너무 멀리 있었다.


난 사람을 쉽게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 우리 건축가들을 만났을 때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중년의 정 소장님이 입고 있었던 초록색 바지가 마음에 들었고, 말도 잘 통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것이 곧 설계 결과물에 대한 무조건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안이 나오면 마음에 드는 것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먼저 보였다. 하지만 불안하거나 불만스럽지 않았다. 대화가 잘 통하고, 소통이 잘 되니 수정하고 보완하면 될 일이었다. 긴 시간 동안 여러 번 고쳐 그려 착공 도면을 완성했다.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있고, 살다 보면 더 아쉬운 부분이 나올 것이지만 만족한다. 정 소장님 말대로 그릇을 빚는 것은 건축가 몫이지만, 거기에 담겨질 삶은 우리 몫이다.


설계 계약을 할 때 업무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 정 소장님을 비롯한 설계팀은 어느 순간부터 경계를 오가더니 이제는 선을 훌쩍 넘은 것 같다. 우리는 80%의 완성도라고 했던 설계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정 소장님에게 SOS를 쳤다. 그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받아주셨다. 공사가 끝나면정 소장님과 그리고 지금 현장에서 고생하는 시공 소장의 몸에서 사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우리 집을 그려주고 지어준 건축가들은 우리에게 백년손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살면서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관념적이거나 의례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살아 숨쉴 것이다. 우리가 설계 비용을 내지만, 그것이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범벅된 내 마음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나의 마음도 이미 사무적이고 의례적인 관계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잘 지어진 집에서 잘 살고, 우리 집에 오실 때 따뜻한 저녁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마침 설 명절 전에 인사도 하고, 덕담도 나눌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다. 곧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울 날이 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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