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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Feb 04. 2020

집은 백만 스물 두 가지의 결정

100% 좋은 결정은 없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백만 스무 가지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다. 선택하고 결정할 것들이 쓰나미처럼 마구 밀려오기도 하고, 잠잠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다가오기도 한다. 고르는 게 귀찮아서 대형 쇼핑몰도 잘 안 가고 작은 가게만 전전하는 나에게 분명 큰 도전의 시간들이다.   


가장 큰 결정은 집을 짓겠다는 결정을 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 가장 힘든 결정이었고, 그래서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삶의 철학(?)과 인생의 향방을 바꾸고, 오랜 꿈과 좋아하는 것들을 잠깐 보류하고,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결정하고도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후회도 했고, 원망하기도 했고, 혼자 방황도 많이 했다. 그렇게 겨우 겨우 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왔다.



이제 숨통이 좀 트일 줄 알았다. 이런 젠장,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우리 딴에는 맥시멈으로 잡아놓았던 예산 범위를 훌쩍 넘어가고, 생각지도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했다. 다시 또 하나의 터널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겁이 났고, 병이 났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에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땅을 사고 터를 닦았으니 어떻게든 헤쳐 가야만 했다. 많은 것을 바꾸고, 포기하면서 다시 터널을 빠져나왔다. 휴...! 이제 한숨을 돌렸다.


그렇게 연이은 터널을 지나고 나니, 나머지 결정은 그저 귀여운 수준이다.


거실 창문에 턱을 둘 것인가, 말 것인가?


엊그제 저녁 현장 소장에게 거실 창문에 턱을 둘 것인지, 턱을 없앨 것인지 그 여부를 결정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장단점이 있다고 했다. 턱이 없으면 다니기는 쉽지만, 비가 거세게 오면 비가 들이칠 수도 있다고 했다. 잠시 고민한 후 우리는 턱을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실 창문 앞에 필로티 데크가 상당한 깊이로 빠져 있고, 같은 깊이로 2층 바닥이 처마의 역할을 할 것이어서 비가 들이치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복도에 코너를 그대로 둘 것인가? 파란색 바닥을 메워서 각을 줄일 것인가?


며칠 전에는 2층 복도 코너에 각을 둘 것인지, 아니면 코너를 메워서 둥글리면 좋을지 현장소장이 물어왔다. 아무래도 각진 것보다 둥글리면 지나다닐 때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남편은 시각장애가 있는 엄마가 코너를 돌다가 부딪힐까 봐 둥글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배려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비장애인 입장의 배려다. 난간을 잡고 움직이는 엄마에게 큰 차이가 없을뿐더러, 각이 많아지면 방향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오히려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능적인 효과는 적다고 보고 디자인적으로 어떨까 고민해보았다. 입체적으로 보는 능력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미 계단실이 오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어 각을 한 번 더 주면 복잡해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코너를 직각의 형태로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 현장 소장 입장에서는 그냥 도면대로 할 수도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 새로운 선택지를 기꺼이 내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집을 짓다 보면 크고 작은 결정의 순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찾아온다. 그때 결정은 무한정 미룰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무조건 결정해야 한다. 적극적인 결정은 물론이고, 포기도, 양보도, 안 하기로 한 결정도 결정이다. 어차피 산다는 것이 선택의 연속이긴 하지만 집 짓기는 단기간에 매우 집약적이고 다채로운 선택의 향연, 결정의 결정판이다. 물론 그에 따른 리스크와 책임은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결정도 자꾸 하다 보면 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결정이 힘든 친구들에게 집을 지어보라고 한다. 농담이 좀 심했나?ㅎ


결정하는 일은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오죽하면 결정장애라는 말까지 있을까. 경우의 수가 많고, 기회비용이 높고 리스크가 클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고통스럽더라도 결정을 해봐야 그 결정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다. 그래서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일단 하는 쪽으로 결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원(돈)은 한정적이고, 욕심은 무한대다. 욕심대로 다 할 수 없으니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머지는 좀 포기하는 것도 필요하다.


결정이 너무 힘들 땐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에 가중치를 두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부모님, 남편, 그리고 함께 하는 건축가들에게 상당히 의지하고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결정을 누군가에게 미루는 것이 아니라 가중치만 둘뿐 내 의견이 분명히 서있어야 한다. 나는 남편이 하자고 해서 할 수 없이 한 거라고 말하면서 한동안 남편을 꽤나 원망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태도는 나를 갉아먹고 남편을 힘들게 할 뿐이었다. 남편이 시작만 했을 뿐 같이 한 선택이고 이제 같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하나 집 지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100% 좋은 결정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결정에는 장단점이 분명히 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단점이 없거나, 단점이 몰라서가 아니라 단점을 알면서도 결정하는 것이다. 집을 짓기로 했을 때도 그랬고, 건축비 정할 때도 그랬다. 아직까지 반대되는 생각과 믿음, 가치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여기저기서 충돌한다. 잘한 짓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른다. 끝나 봐야 안다. 어쩌면 끝나도 모른다. 어차피 일들은 계속 벌어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극심한 인지부조화를 겪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정신무장이 필요하다.


집짓기 참 잘했다.

집 짓는 거 참 재미있다.

집 지어서 참 좋다.

이렇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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