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바구니 독립운동

초딩 생활 독립운동 1__자기 빨래는 자기가 하자

by 무엇이든 씁니다

우리 집에는 빨래 바구니가 3개 있다.

나, 남편, 그리고 딸. 세 식구 모두 자기 빨래 바구니가 있다.


나는 일찌감치 현모양처가 되기는 글렀고, 그럴 마음 1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밥, 빨래 정도는 해줘야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정도의 엄마 노릇, 주부 역할도 힘에 부쳤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산더미 같이 쌓인 집안일에 영혼이 탈탈 털리곤 했다. 하면 하는 대로 힘들고,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마음이 불편했다.


특히 빨래는 외주가 어렵다. 세탁기 돌리고, 널고, 걷고 개서 옷장에 정리하는 일까지 꽤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세탁기 돌리는데 1시간, 말리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려서 한 번에 후다닥 끝낼 수도 없다. 세탁기 돌려놓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까먹고 출근했다가 빨래를 다시 하는 일도 있었고, 마당에 빨래 널고 나갔다가 비에 젖어 다시 빨래하는 일도 왕왕 발생했다. 식구가 달랑 셋밖에 안되는데도 빨래 바구니는 왜 이렇게 빨리 차고 넘치는지 빨래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즈음에 빨래 건조기가 유행했다. 역시 주부들의 마음은 남편이 아니라 대기업이 알아주는 건가. 빨래 건조기는 빨래를 널고 걷는 과정이 필요 없다. 한참 유행할 때 잠깐 솔깃했지만 뭘 사는 일에 보수적인 나는 빨래통 독립부터 해보기로 했다. 각자 빨래 바구니를 가지고, 자기 빨래는 자기가 하는 것이다.

이제 니 빨래는 네가 하도록 해라.


남편은 이미 그러고 있었고, 딸아이도 선뜻 그러겠다고 했다. 당장 딸의 빨래 바구니를 따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빨래 바구니가 차오르고, 빨래를 안 해서 양말이 떨어지는 일도 발생하자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양말을 위해서라도 주말엔 꼭 빨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고, 빨래 양을 줄이기 위해 자체적인 개선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제대로 입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휙휙 잘도 벗어놓더니 이제는 빨래통에 넣는 일에 아주 신중을 기한다. 엔간히 더럽지 않으면 한 번 더 입고, 겨울엔 이삼 일씩 입다가 빨래통에 넣었다. 이제는 내가 제발 옷 좀 갈아입으라고 사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빨래를 해주지 않고 참는다)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놓던 일도 없어졌다. 양말이 한 짝씩 없어지자 이제 웬만하면 양말 짝을 맞춰서 빨래통에 벗어놓는다. 옷을 뒤집어 벗어놓는 버릇도 사라졌다. 빨래 널거나 갤 때 다시 뒤집는 품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빼주는 거까지는 해줄 때가 많지만, 빨래는 꼭 직접 널고 걷도록 한다. 가끔 내가 해줄 때는 이번엔 내가 해줄게, 꼭 생색을 낸다. 자기 할 일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빨래통을 독립하고 나니 한층 여유가 생겼고, 빨래건조기 유혹도 사라졌다.



집을 설계할 때 소장님이 2층 드레스룸 바닥에 빨래를 1층 세탁기로 직행하는 빨래 구멍을 설계도에 그려놓으셨다. 빨래 구멍이 있으면 빨래 바구니를 들고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되니 훨씬 편해지기 때문이다. 동선에 대한 배려는 너무 감사했지만 나는 빨래 구멍을 없애달라고 했다. 우리는 빨래가 섞이면 안 된다고. 우리 집은 자기 빨래는 자기가 하는 시스템이고 나는 이 시스템을 꼭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난 빨래 바구니 전도사, 빨래 바구니 독립운동을 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빨래 바구니를 독립해보라고 권한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효과가 크다. 최소한 빨래는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엄마가 빨래해주는 사람이 아니며, 기본적인 청결과 품위를 위해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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