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냉이

구체적으로 행복해질 시간

by 무엇이든 씁니다
심봤다!


늦은 오후 딸과 산책하러 텃밭에 갔다가 횡재했다. 불그스름한 냉이가 바닥에 다닥다닥, 한가득이었다. 털썩 주저앉았다. 겨울 냉이는 꼿꼿이 서 있으면 안 보인다. 불긋불긋한 게 땅 색깔과 비슷해서 땅바닥에 바짝 붙어서 쭈그리고 앉아야만 보인다. 땅에 코를 박고 개처럼 킁킁댔다. 겨울냉이는 산삼못지 않은 보신채다. 심 봤는데 어찌 그냥 지나갈쏘냐!



호미를 구해서 정신없이 캐기 시작했다. 겨우내 내린 뿌리가 어찌나 깊은지 웬만해서는 뿌리 끝까지 캐기가 어려웠다. 냉이를 잡아당기다가 뚝 끊어진 뿌리 사이로 퍼져나온 냉이 향이 코를 마비시켰다. 흙을 대충 털어내고 뿌리를 뜯어 질겅질겅 씹었더니 흙맛 사이로 단물이 쭉 빠져 나온다. 달큰한 맛이 참냉이다. 날이 어두워져서 정신없이 캤다. 엄마, 나도 캘래! 딸아이도 신이 났다.


엄마, 이 많은 냉이는 누가 심은 거야?

"누가 심은 게 아니라 바람에 날려온 냉이 씨가 뿌리를 내려서 스스로 피어난 거야. 냉이는 그런 능력이 있어."


사실 할 일이 태산같았는데 모두 까먹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냉이를 캤다. 금세 소쿠리가 수북해졌다. 만선의 기쁨이 이런 건가? 소쿠리를 이고 가는 앞서가는 딸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너 엄청 예쁘다. 봄을 몰고 오는 봄처녀같아.

내 말에 딸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다.


이보다 구체적이고 생산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말이 구체화되고 공감각적으로 살아난다. 행복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지금 냉이 캐는 시간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별다른 손재주가 없어서 뭘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채집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다. 손과 발만 있으면 어디서든 생산할 수 있다. 사실 생산은 자연이 알아서 하고, 나는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모든 액티비티가 장비발로 귀결되는 요즘, 채집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과학적인 호미 하나만 있으면 끝이다.


겨울난 냉이 뿌리의 자신감, 건강함


수렵채집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는 들로 밭으로 나물 캐러 다니면서 나를 밭에 풀어놓곤 했다. 밭에서 흙 주워먹고, 풀 뜯어먹던 생각도 어렴풋이 난다. 그래서 밭에만 가면 할머니 생각이 나고, 나물에서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골치 아픈 일로 속 시끄러워도 호미질할 때만큼은 할머니 품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수렵까지는 아니더라도 채집이 가능한 곳에 살고 싶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살게 된 곳이 지금 사는 동네다. 이제 곧 이사 갈 곳도 산과 밭과 논이 있는 곳이다. 아마 우리 집 뒤뜰에도 뭔가 올라올 것이다. 지난 겨울, 공사 들어가기 전에 토목 사장님이 곡갱이를 들고 뭔가 캐고 계셔서 가보니 달래였다. 현장소장이 동네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쪽이 원래 달래 밭이었다고 했다. 집 짓느라고 땅을 파 제꼈지만, 달래는 올라올 것이다. 달래가 어떤 놈인가?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생명력 하나는 끈질긴 놈 아니던가. 우리집에 오는 친구들에게 달래장이며 달래장아찌 만들어주며 생색낼 것이다.


이제 곧 쑥이며 냉이며 달래며 돌나물이 지천에 널릴 때가 되었다. 봄나물들은 날 가만두지 않는다. 퇴근하면 가방 던져놓고 나물 캐러 가겠지. 나뭇가지에 찔리고 호미에 치여서 손은 상처투성이가 되겠지. 나물 다듬다 꾸벅꾸벅 졸겠지. 눈 부비며 나물 다듬다보면 손톱밑이 까매지겠지. 끓여먹고 무쳐먹고, 동네 사람들 불러서 나눠 먹겠지.


봄에는 나물 캐느라고 너무 바빠서 약속도 안 잡는다. 그냥 나물 캐기만도 너무 바쁜 시간들이다. 나물 캘 때는 전화도 놓고 나가서 연락두절이 된다. 그냥 채집에만 집중하는 시간이다. 그렇게...단순하게, 구체적으로 행복한 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