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 생활 독립운동 4_경계 세우기
엄마! 엄마!! 나 드디어 해냈어!!!"
이 경쾌한 목소리 좀 보소!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목소릴세!
무슨 일인고 들어보니 ㅇㅇ이가 놀자고 했는데, 싫다고 거절했다고 했다. 싫다고 해도 믿지 않아서 단호하게 '오늘은 피곤해서 놀기 싫다'고 거절하고 집으로 왔다고 했다.
"오~정말? 드디어 해냈구나. 잘했네, 잘했어!"
잘했다고 궁디 팡팡 두드려주었더니 우쭐해한다. 남들이 보면 웃길지 모르지만, 딸아이가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하다. 거절! 우리 모녀에겐 매우 중요한 숙원사업이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거절을 잘 못한다. 본인 말에 의하면 친구들이 놀려도 참고, 놀기 싫어도 놀고, 하기 싫어도 하고, 양보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물론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고!) 싫으면 싫다고 해라, 왜 싫다고 말을 못하냐, 싫다고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저얼~~ 대 모른다, 며 나도 못하는 걸 애한테 하라고 가르친다. 자기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자기가 기억하는 한 아주 아주 어릴 때부터 참고 양보해 버릇해서, 아이들이 자기를 양보 잘하는 착한 아이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바꿀 수가 없다고 했다. (속으로는 과연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그렇다 치고!) 그건 너의 진짜 모습이 아니니까 이제 본색을 보일 때가 됐다고 하니까, 이제 와서 그럴 수가 없다며 엉엉 운다. 얼마나 서글프게 울던지, 가슴이 찡했다.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려고도 했는데, 뭐랄까...변태를 앞두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진지하면서도 코믹하다고 할까...)
딸아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거절을 못하는 편이었다. 나이를 먹어 요령이란 게 생기고,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도 힘에 부쳐 남을 배려할 여력도 없지만 예전에는 거절 못해 꽤나 힘들어했다. 특히 직장에서 물불 안 가리고 일을 모두 떠안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2~3년 안에 꼭 번아웃되어 일을 그만두고, 회복과 치유를 핑계로 퇴직금으로 멀리 떠나갔다 오곤 했다. 이런 삶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완전히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좀 다를까 싶어서 미국으로 떠났는데, 거기서도 나는 나였다.
멀리 타국에서 만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추천해준 책이 'boundaries(부제: When to Say Yes, When to Say No-To Take Control of Your Life)'였다. 원서로 읽어서 제대로 읽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이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배려랍시고 한 'yes'가 상대방을 더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리한 요구인데도 거절 못 하고 계속 수용하게 되면, 상대방은 경계가 불분명하니까 경계를 침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경계가 분명해야 소통과 잘 되고, 공감할 수 있으며,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15년 전에 원서로 읽어서 제대로 읽은 건지, 제대로 기억하는 건지 장담을 못하지만, 그렇다 치고!) 경계 세우기는 부부, 이웃, 친구, 직장동료, 부모 자식 등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지라, 어릴 때부터 배워두면 두고 두고 좋지 않을까? 나도 잘 못하는 거지만, 딸은 잘했으면 좋겠다. (이런 게 부모 마음인건가?)
딸에게 거절하는 법을 가르치기로 했다. 무조건 거절하기가 아닌 경계를 세우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나도 같이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1차 목표는 딱 한 번만 "say no"를 해보는 거다.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두 번 세 분은 쉬운 법이니까. 그렇게 결의하고 한참을 잊고 있었는데, 딸이 먼저 해냈다. 그 어려운 "한번"을 말이다.
거절을 해낸 딸아이의 얼굴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고, 한층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한뼘 정도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 자기의 경계를 늘 확인하고, 친구들에게 자기 경계를 보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경계도 존중하는 그런 딸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