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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Mar 16. 2020

막걸리 한 잔

상량식

내가 요즘 애정하는 가수 영탁의 '막걸리 한 잔'을 들으면, 위로가 된다. 가끔 막걸리 위력이 대단하다는 걸 느끼는데, 어제도 그랬다.


조촐한 상량식(상량 고사)을 하기로 했다. 상량(上樑)이라 함은 집의 가장 꼭대기, 집의 중추에 해당하는 지붕의 마룻대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상량을 하고 마룻대에 서까래를 걸면 집의 외형이 완성된다.


나는 상량식을 안 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내던 제사도 없애는 시대이기도 하고, 보통은 안 하고 지나간다기에 우리도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집 전체를 나무로 짓는 한옥이나 목조주택도 아니고, 이미 상량에 서까래까지 다 올라간 마당에 지내는 상량식이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세 집이 나란히 짓는 이상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벼이 넘어갈 수는 없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 없이 막걸리 한 잔 나눠마신다고 생각하면 안 해야할 이유도 없다.


막상 형식을 선택하니 상량식의 본래 의미와 내용을 생각해보게 된다. 상량식의 본래 의미는 감사와 축하와 위로와 기도일 것 같다. 집 짓기의 큰 고비를 넘기게 된 것을 자축하고, 우리 집 짓느라 고생하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고, 집을 짓는 데 사용된 나무의 정령을 위로하고, 마지막까지 별 탈 없이 끝나기를 기도하는 거다. 본래 집의 뼈대를 완성하느라 고생한 목수분들을 대접하는 의미도 있지만, 코로나 시국에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아무래도 좀 무리라고 판단했다. 전날 미리 목수분들께 따로 상량채(수고비? 회식비?)를 챙겨드리고, 상량식은 세 집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하기로 했다.



큰 의미를 두지 않지 않는 나도 막상 고사상을 차리고 있노라니 묘한 셀레임 같은 게 느껴졌다. 3호 집 엄마가 우리집으로 건너와서 함께 준비하다 보니 명절에 큰 집에 모인 것 같은 잔칫집 분위기가 났다. 해본 적은 없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상량식에 돼지머리와 시루떡이 올라간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돼지머리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원당시장에서 사 온 편육으로 대체하고, 단골집에서 시루떡도 한 판 샀다. 원래 남편이 작은 떡시루를 통째로 맞췄지만, 코로나 시국에 이웃과 떡을 나눠먹는 것도 조심스러워 취소했다. 엄마가 광목에 쌀이나 밥 한 그릇을 싸 가지고 가라고 해서 오곡밥을 추가하고, 남편이 술안주로 사 온 문어를 추가하고, 3호집 엄마가 가져온 커다란 배를 올리니 그럴듯한 고사상이 차려졌다.



어제까지 작업하던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장이 깨끗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2호 집이자 현장소장님이 상량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느껴졌다. 1호 집인 우리 집부터 차례로 돌며 고사를 지내고, 집 곳곳을 돌며 우리 집에 깃든 신들(상량에 깃든 성주신, 안방의 삼신, 부엌의 조왕신, 마당에는 터주신, 뒷간에는 측신, 우물에는 용왕신 등등 많구나 많아)에게 막걸리 한 잔을 올리고 혹시 내가 모르는 신이 또 어디에 있을지 몰라 2층 창문 난간에 막걸리 한 잔을 올려두었다.(누구의 목을 축이려나? 새가 와서 목을 축이고, 이집 맛집일세...이러려나?ㅎ)


누구를 위한 막걸리 한 잔인가?


세 집을 돌고 난 뒤 3호 집 주방에서 김치전을 부쳐 막걸리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3호 집 주방에서 최초의 요리와 식사가 이루어진 셈이다. 아기 때문에 친정에 가서 지내는 2호 집 엄마와 아이들은 화상으로 연결하여 상량식에 함께 했다. 홀로 고사를 지내는 2호 집 아빠를 위해서 그 집 아들의 친구인 딸들이 함께 고사를 지내주었다. 두 집 딸을 옆에 세우고 기분이 좋아진 2호 집 아빠는 딸들에게 천 원씩 용돈을 주었고, 막걸리도 한 모금씩 따라주었다. 그 용돈 때문인지, 막걸리 한 잔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진 딸들은 동네 고양이를 쫓다가 심술 맞은 봄바람이 한 가운데 누워 달달한 봄날 오후를 보내고 왔다.


방수 시트까지 마무리한 지붕 모습


상량식을 순우리말로 바꾸면 '막걸리 한 잔'이 아닐까 싶다. 막걸리 한 잔 들이키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아무쪼록 무탈하고 순조롭게 잘 마무리되고, 이 집에서 편안하게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잘 날을 기다린다.


막걸리 한 잔 하고 드러누운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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