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홍 Feb 23. 2020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을 만들다

시트콤 같은 식사 중 희망 비슷한 것을 본 것 같기도

엄마가 원하는 딸이 되진 못할 것이라고 쓴 글이 있는데 사실 엄마는 아들도 본인 입맛에 맞게 키우지는 못했다. 자식농사에 실패했다는 것을 이런 의미로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엄마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일 것은 틀림없다.


내 부모는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전통적 성역할을 그대로 고수하여 본인들이 만든 것과 동일한 모양의 가족을 만들어 가문을 이어가주길 바라는 욕구가 충만한 사람들이다. 대단한 가문도 아닌데 참 눈물 나게 우스울 정도로 강렬한 욕구이다.


글에서 내내 쓴 것처럼 나는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 딸이다.

그리고 내 동생은 미국 여자와 국제연애 중인 아들이다.


그게 뭐? 국제연애가 뭐 어때서. 결과적으로 아들은 이성애자라는건데 여자랑 결혼한 딸만큼 문제인가?


물론 그것이 대부분의 시선이고 의문이 드는 지점일 것을 알고 있기에 글 초반에 내 부모가 가진 강렬한 욕구를 먼저 한번 더 상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욕구는 거의 숙원에 가까운 수준이니까. 무엇이 사회적으로 더 큰 파장을 가지고 올 문제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나의 상황이 더 문제일 것은 확실하지만 내 부모에게는 똑같이 절망적일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가족의 와해를 뜻한다. (적어도 내 부모에게는.)


동생은 여자 친구가 있고 미국 사람이라는 것까지 밝힌 상태이지만 내 부모는 그 사실을 철저하게 모른 척 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최근까지도 "네 동생은 아직도 여자 친구를 안 만든다니? 멀쩡하게 낳아놨더니 그놈 자식이 부모 마음을 왜 이렇게 애타게 만들까."하고 굉장히 이상한 방식의 대응을 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대로 결혼식까지 올려버렸고 최악의 경우 부모가 알아버리면 그분들과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보고자 할 생각이지만 우리에게 그런 딸은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정 또한 존중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반쯤 마음 먹은 상태이기도 하다. 덤덤하게 썼지만 슬픈 일일 것이다. 혈연을 끊는다는 것,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했다는 이유로 혈연을 끊는 것이 슬프지 않을 수는 없다.

물론 한 시간마다 한 번씩 깨서 울었던 갓난쟁이였던 탓에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고얀 딸' '못돼 처먹은 딸'로 불리는 나는 삶을 내 뜻대로 살아갈 방향으로만 걸어와서 여기까지 도달했고 다시 '착한 딸'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인 상태다. 슬픈 것과 그들 의지대로 살아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그러나 동생은 못된 누나의 여파로 '착한 아들'로 살기를 선택했고 아직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인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연인을 완강하게 무대응으로 거절하는 부모에 대해 불만과 분노가 서리는 마음 한 구석엔 연민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상황은 그랬다.


가끔 우리 부부는 동생 커플과 함께 식사를 한다.

우리 집에서 함께 음식을 차려서 먹기도 했다. 동생 여자 친구가 동생과 함께 우리 집에서 직접 요리한 미트볼 스파게티는 정말 맛있고 푸짐했다. 나는 집에서 직접 만든 미트볼을 난생처음 먹어보았다. 실제로 만드는 걸 슬쩍 봤을 땐 꼭 만두 속 같은 느낌도 들어 재미있었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삼겹살을 구워 대접했는데 동생의 여자 친구는 집에서 직접 담근 김치는 처음 먹어본다고 너무 맛있다고 연신 감탄했다. (아내의 할머님이 직접 담가서 주신 소중한 홈메이드 감치였다.) 우리는 김치를 구워 직접 전기그릴 위에서 삼겹살과 함께 구워서 권했다. 이게 꿀 조합이라며.


이렇게 넷이 자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잘 통하지는 않는 2개의 언어를 섞고 손짓 발짓을 섞으며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아마 언어의 제약으로 더 깊은 대화를 하진 못할 수 있어도 각자 가지고 있는 가족과 부모에 대한 감정, 두 나라 각자의 정치 상황과 보수적인 지역, 진보적인 지역 같은 이야기들을 얕게나마 나누었지만 불쾌한 일이나 언짢은 분위기는 흐르지 않았다.


최근 밖에서 내가 한턱 내기로 하고 넷이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그 식사 중 불현듯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동생커플이 내 부모의 거부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을 때인지, 우리 부모가 나를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한다면 동생이 막아주어야 한다고 내가 너스레를 떨었을 때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거 시트콤이 따로 없네. 내 부모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결국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가족 모두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오히려 여기에 있잖아.'



원래 가족은 이렇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냥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서로의 안녕을 빌고 그런 사람들 또한 가족이라고 느끼고 결국은 가족이 되어가는 것 아닐까. 그것이 부모가 원하는 가족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내 부모가 원하는대로 능력좋은 남편만나 내조하며 아이를 키우고 엄마에게 아이 어떻게 키우는지 조언을 구하는 딸과 내조 잘하는 아내를 얻은 능력이 좋은 아들이 대를 잇는 손주들을 낳고 그렇게 다같이 모여 저녁을 먹는 것만이 '가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란 뜻이다. 그것이 내 부모의 강력한 숙원임을 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남매 모두 그런 가족의 형태를 이루는데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니 안타깝지만 부모가 포기하는 수 밖에. 


가족이라는 단어 특유의 끈적함에 항상 치를 떨던 나는 그 저녁시간 속에서 고요한 희망을 느꼈다.

(가족같은 회사... 이런 단어가 싫은 것과 비슷한 듯 합니다.)


이렇게 서로 걱정하고 행복을 기원하며 슬픈 일엔 함께 슬퍼하는 사람끼리 모여 삶을 풍성하게 만들며 함께 늙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답잖게 낙관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결국 그게 가족 아닌가. 뭐.







작가의 이전글 엄마가 원하는 딸은 될 수 없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