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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Apr 05. 2020

친구가 없는 부부의 봄

집순이와 집순이가 결혼해버렸구나


나는 정말로 집 안에서의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온 후 잠들기 직전까지 혼자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 잠들기 싫어 발버둥 쳤고, 대학교 땐 자체 휴강의 아이콘이었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무언가 유익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유익함 속에 파묻혀 숨이 막혀가다가 겨우 찾은 시간 사이 틈에서 무익함을 만끽하는 쪽에 가까웠다. 


왜 유익하게 살아야 하는가, 무익하고 무해한 시간이 이토록 달콤한데.


다리에 감겨드는 이불과 폭신한 침대에 누워 봄바람이 살랑이는 열린 창문을 느긋하게 보며 나는 그 시간 일분일초를 빠짐없이 참 사랑했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요하고 공기조차 사라진 것 같은 그 시간을.

물론 이 사회에서 직장인(1) 정도의 개성 없는 역할을 맡고 있는 지금은 무익한 시간을 위해 유익한 시간을 얼마나 열심히 달려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다리에 감기는 촉감 좋은 이불도, 적당하게 폭신한 침대도,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드는 창문도 모두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즉, 나의 일상은 모두 집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 같은 것이다. 출퇴근을 하고 그 사이사이 사람을 만나고 별로 관심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웃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침대만을 떠올리며 깡그리 잊는 그 일상이 곧 대가다.


이런 내가 주말에 친구를 만나자면 많은 결심과 고민과 앓는 소리가 수반된다는 것이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아내와 애인이 되기 전에도 그랬다. 나는 먼저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카톡 메시지를 길게 이어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당시 내가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무척 헷갈렸노라고 연애 시작 후 아내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 부분은 듣고 보니 조금 미안했다.)


나는 평균 한 분기에 한 번에서 두 번 꼴로 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 

횟수로 써보니 좀 놀랍긴 한데 고쳐보려고 노력할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출근하지 않는 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척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다. 주말에 하루 친구를 만나면 그 후 돌아오는 주중이 무척 버겁다. 어깨에 큰 돌을 짊어지고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내내 무겁고.

뭘 그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내겐 절실한 문제라서 보통은 주말을 남에게 내어주지 않는다. 주중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도 눅진하게 지친 마음을 팡팡 털어 팽팽하게 당겨 말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만큼 사람에게 에너지를 빼앗겨 무조건 혼자 시간을 보내며 충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적인 일상보다는 정적인 일상을 수행하는 편이다. 혼자 훌쩍 어디론가 가서 원하는 것을 사서 돌아오기도 하고 혼자 핸드폰을 보며 이것저것 즐겁게 보거나 읽기도 하고, 고양이 두 마리를 세심하게 살피고 돌보는 일도 하고 집안을 훑어보다가 무언가 보이면 고치고 관리하기도 하고.

(쓰고 보니 동적인 일상이네요.)


움직임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내 아내도 집 밖에 나가 사람들과 다 같이 어울려 단체 행동을 하는 것보단 혼자 본인이 재미있는 것을 하는 시간을 더 즐거워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아내의 인간관계는 친구보다는 연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시간을 소비할 때 친구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쓰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고 보니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는 친구가 없다.

각각 오래 유지 중인 친구야 당연히 있지만 부부 동반을 놀러 가거나 함께 코스트코라도 가서 대량 식재료를 사와서 반반 나눌 만큼 함께 부부생활을 공유하고 영위할 친구는 만들지 못했다. 굳이 코스트코 이야기를 쓴 이유는 역시 부부 친구가 있다면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로망이라 그렇습니다, 네.


나의 친구, 아내의 친구로 지금까지 남아준 고마운 사람들은 우리의 성향을 알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 분기에 한 번씩 얼굴 보더라도 살아있구나, 너희 둘 다 잘 지내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해주는 듯 하지만 우리 부부와 함께 부부 동반으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기려면 굉장히 복잡하고 여러 에너지를 쓸 일이 생길 것이 자명하다.

예를 들어 초반에 자주 만나야 서로 익숙해지고 이야기 거리도 늘고 마침내 코스트코도 함께 가는 사이까지 될 수 있을 텐데 우리 부부가 어떤 부부와 주말이나 주중 저녁에 자주 만나도록 추진할 만큼 열정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갈망하고 바라고 있는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와 성격이 잘 맞고 서로서로 거슬리지 않을 만큼 정치색과 신념과 종교관이 잘 맞고 가까운 곳에 사는 퀴어 부부를 찾아야 할 텐데 그 또한 그렇게 쉬운 퀘스트는 아니다. 

잡몹 잡는 저렙 퀘스트보단 훨씬 권장 레벨 높은 퀘스트겠지.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부부는 친구가 없는데 앞으로라고 크게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또 봄이 왔는데 지금까지와 똑같이 집에서 머무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앞으로라고 다르겠는가. 벚꽃이 만개하는 강가와 가까운 집에 몇 년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발걸음을 해보지 않은 우리 부부였다. 늘 봄이 오기 전엔 "올 해는 벚꽃 구경 한 번 가야지."라고 말하지만 막상 봄이 오면 "가서 그냥 걷는 것 밖에 안 하잖아, 그냥 다른데 놀러나 가자."라고 말하고야 말았는데 올 해라고 뭐 달랐겠는가.


그냥 둘이서 봄을 만끽한다. 집 안 보일러 전원을 켜지 않아도 방바닥이 조금 덜 차갑다는 것으로 봄이 왔다는 것을 느끼거나 창 밖에 꽃이 펴서 색이 입혀지는 모양을 보며 봄이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봄은 늘 그랬다. 앞으로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게 또 별로 싫지 않으니까 아직까진 다행스럽다. 

집 안에만 박혀 둘만 있어도 아직까진 괜찮다. 오히려 이런 부분이 잘 맞아 다행스럽다고 안도하는 봄이다.

내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충전하는 것을 아내가 이해해주고, 아내가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고, 둘만 있어도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안도하는 봄이다.



올해 봄은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길어 많은 분들이 고생스러우실 것 같습니다만.. 집순이의 봄을 한 해만 함께 체험해보시면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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