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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Mar 22. 2020

괜찮아, 네 미래엔 멋진 아내가 있어

어린 나와 마주한 자리에서 내가 말했다.


열일곱 또는 열셋의 나 모순덩어리인 그앨 안고
다정히 등을 다독이며 조근조근 말하고 싶어

김윤아 <Girl talk>  中



가끔 '열일곱 또는 열셋의 나 모순덩어리인 그 앨 안고'라는 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정말로 '모순덩어리'였던 내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게 함께 떠오르며 다들 그즈음이 가장 모순덩어리인 걸까 의문도 든다. 어쩜 딱 그 나이만 콕 집어 가사 안에 들어가 있을까 싶어서.


만약 내가 열일곱 또는 열셋의 나를 마주한다면 나는 그들과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안아줄 수 있을까.

사실 그들은 내게 아픈 손가락이다. 미운 부분이고 아픈 부분이고 화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되도록 만날 일이 없기를 바라는 이들이기도 하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나이가 있었다. 그것도 그즈음이다.

열셋에 그랬고 열일곱에 그랬다. 빨리 죽어버렸으면, 지겨워 죽겠다, 뭐가 재밌어서 웃는 건지 모르겠네, 다들 맛있고 예쁜 것들이 왜 그렇게 좋을까, 아아- 어서 죽어버렸으면.

우스운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높은 곳에 올라가면 떨어질까 두렵고, 어두운 곳에 가면 무서운 사람이 잡아갈까 두려웠다. 


그러니 그즈음의 나는 정말로 모순덩어리였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르겠느냐만은)

권태와 무기력을 죽음을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그런 말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 내게는 그런 정신노동 외엔 별로 감상적이 될 일이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또는

그저 외로웠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의 외로움은 근본을 몰랐다. 

또래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잠깐이고 곧 피로해졌다. 차라리 혼자 조용하게 책을 읽는 시간이 좋았지만 학교에서 그러고 있을 수 없어 대부분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시끌벅적하게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주변에 늘 누군가가 있는데도 왜 외로웠는지 당시엔 몰랐다.

그래서 나는 모순 속에 빠져 스스로의 외로움을 합리화했다. 그 나이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유달리 똑똑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

"너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외로운 거야. 그리고 너의 외로움은 네가 남들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해서 생긴 당연한 감정이지. 엄밀하게 따지면 넌 두려운 거야. 넌 정말로 겁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럼 어린 나는 발끈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정녕 죽고 싶은 것이다, 네가 뭘 아느냐, 어른들은 이렇게 조금만 나이가 어리면 죽고 싶을 일도 없는 줄 안다고 지금의 내게 반감을 가질 것이다. 

그때의 나라면 그러고도 남지. 지금의 나는 그냥 웃어버릴 테고.


사실 알고 있었다.

지금 웃고 떠드는 이 친구들과 나는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이 점점 외면할 수도 없을 만큼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가능성이 너무 두려워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남들과 다른 길로 걸으라니, 그렇게 두려운 걸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남들하고 똑같이 사는 것도 벅찬 내게 아예 길을 새로 만들어서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곳으로 걸어가라니. 


차라리 지금 당장 죽어버리면 그런 무서운 일 겪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누구에게도 이 고통을 위로받을 순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너무 외로워, 외로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아.



그 당시엔 그랬다.

친구가 남자 친구가 생겼고, 너에게도 얼른 남자 친구가 생겨 더블데이트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학생 무렵 그렇게 쉽게 남자 친구를 사귀었고 어찌어찌 친구가 원하던 더블데이트도 했다. 그냥 네 명이서 카페 같은 델 가서 뭔가 먹었던 것 같은데 기억도 희미하다.

물론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도무지 그 시간을 버티질 못했다. 

남자가, 여자가, 이건 남자가, 넌 여자니까 안전하게...

'아, 좀 그만해 제발.'

속으로 귀를 막고 토악질을 하며 버틴 몇 번의 더블데이트 후 주변에 슬픈 척을 하며 쉽게 헤어지고 잊었다.


'이런 걸 얘들은 어떻게 버티지?'

몇 번이고 의문을 품었지만 친구들은 억지로 버티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즐거워 보였고 연애가 잘못되면 정말 진심을 다해 슬퍼했다. 내 가짜 슬픔과는 결이 달랐다.


그런 몇 번의 과정, 얼마간의 시간들이 지나가며 내심으론 무척 두려웠을 그 시기의 나에게.

친구들과 다른 길로 흩어질 것이 두렵고 혼자 남을 것이 두렵고, 그래서 세상이 너무 싫고 매일 슬퍼 모순덩어리였을 나에게 필요했을 말.




너 괜찮아.
나는 괜찮아.

미래의 너에겐 세상 누구보다 멋지고 다정하고 제일 강한 아내가 있단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귓속말로 소근소근 거리며 마음이 풀어지라고 등어리를 쓸며 말해주고 싶다.


부모가 없더라도 진정으로 축하해주는 하객이 가득 찼던 나의 결혼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아내와 함께 살아가며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매일 고민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지도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네가 걸어갈 길은 생각보다 앞질러 걸어간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과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도. 


그들이 들고 걷는 촛불의 빛으로도 충분히 길을 밝힐 수 있노라고. 









꿈에서라도 네게 말해줄 수 있다면.

"있잖아, 너의 미래엔 정말 멋진 아내와 함께 하는 삶이 펼쳐져.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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