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홍 Apr 12. 2020

엄마가 내 아내를 싫어합니다

아내인 줄도 모르지만 일단 싫어하는 것이 엄마의 본능인가


엄마에게 아내를 '함께 사는 친구'로 소개하던 날, 내 뱃속 장기들이 얼마나 뒤틀리는 기분이었던지 아직도 생생하다. 무언가 알면 안될 것을 알아차릴까봐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극심한 긴장감이 들었던 탓이었다.


엄마가 '딸의 친구'라고 소개받은 나의 아내를 위아래로 빠르게 스캔하던 순간, 그리고 눈빛에서 빠르게 '불호'하고 띄우던 순간은 거의 슬로모션처럼 지나갔다. 손바닥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누구나 긴장할 때 그러하듯 나도 그저 속절없이 웃었다. 


'그래도 굳이 싫어할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

사실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엄마는 나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며 당연한 권리라는 듯 아내에게 벽을 치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리고 어떤 아이인지, 내 딸에게 어울리는 친구인지 평가하기 위한 절차였다. 

자고로 거리가 멀어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은가. 뭐, 그런 합리화를 하고 있을 터였다.


부모가 싫어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무례했다거나 표정이 안 좋았다거나, 먼저 싫어하는 티를 내며 버릇없이 굴었다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해명해본다. 아내와 엄마가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도합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기에 무례하게, 버릇없이, 표정이 안 좋게 굴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고. 오히려 아내는 어색할수록 많이 웃는 사람이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웃고 묻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가지 조금 짐작이 가는 것이 없지는 않다.

아내의 머리가 짧고 사회적으로 '여성스럽다'라고 인식하는 복장을 하지 않으며 키가 작고 어려 보인다는 점이다. 이 문장을 쓰는 것이 옳을까, 이런 부분까지 서술하면서 내가 스스로 또 상처를 받는 것 같은데 굳이 써야 하나 싶었지만 이 이외엔 이유가 없으니 기록하는 마음으로 써보았다. 

그렇지만 괴로운 문장이다. 고작 저런 이유로 사람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엄마라는 사람이라니. 그야말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던 사실이 있었다.

내 엄마는 좋다고 평가하는 내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아내에게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이다.


어린 시절엔 멋모르고 엄마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니만큼 대부분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엄마는 늘 비슷한 대답을 하곤 했다.


"네가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으면 그렇게 무시를 당해? 그러고도 친구라고? 걜 성적으로 이기지도 못하면서 뭐가 친구야. 네가 시녀처럼 쫓아다니는 거겠지."

"네 친구가 그랬다고? 그 말을 믿니? 걘 되게 웃겼겠다. 그런 거짓말을 네가 순진하게 믿어주니까."

"아유, 얘. 친구라는 말도 붙이지 마. 어디서 그렇게 수준 떨어지는 것들 하고만 몰려다녀. 저번에 보니까 하나같이 머리스타일부터 얼굴 생김새까지 수준 딱 보이더라."


이런 말들 끝에 참다못한 내가 "그러는 엄마는 얼마나 대단한 친구들만 사귄다고."하고 항변하면 엄마는 "나랑 내 친구들은 키 작은 애들, 공부 못하고 지질거리는 애들하곤 친구 안 했어. 넌 내 딸인데 왜 그 모양이야?"하고 더 호통을 치곤 했던 것이다.


글쎄.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가 이만치 클 때까지 엄마의 그 당시 친구랍시고 만나본 분은 단 한 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키가 크신 분인 건 맞았다.)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당하고 보니 중학교 말부터는 차츰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입도 벙끗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말해봐야 손해였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내 엄마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나도 엄마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우리 모녀 사이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라 믿었고 그 결정은 아직까지 유효했다. 


피치 못할 상황에서 아내를 '내 친구'라고 소개하고 말았지만.

그 또한 무척이나 피하고 싶은 상황 중에 하나였다.


마음이 더 복잡한 것은 아내의 어머님이 나를 긍정적으로 대해 주시는 편이라 그렇다. 보통의 엄마들이 그렇듯 자식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자식의 친구이니 그냥 평범한 수준에서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문득 나를 아껴주신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따뜻해질 때가 있다. 

아무래도 아내의 어머님이니까. 부정적인 평가나 스캔없이 나를 그저 좋은 친구라고 받아들여주시니까.


내 부모가 내 배우자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 배우자는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되는 걸 텐데.

그럼에도 내 부모가 내 배우자를 좋아해 줬으면 내심 바라는 기대는 어쩔 수 없는 걸까?


씩씩한 내 아내는 엄마가 본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다지 관심 가지지 않는 눈치다. 뭐, 어쩔 수 없지, 꼭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지, 그런 마음인가 보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기왕이면 좀 좋아해 주면 어때. 엄마 마음에 안 들어도 엄마 딸 마음 좀 편하라고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어때서, 그런 생각에 자꾸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자식의 배우자 또는 친구에게 굳이 싫은 점을 찾아내서 싫어하고야 마는 그 심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가끔 그 또한 대책 없는 부모의 소유욕이라고 생각한다.

내 것인데 고작 저런 애랑 친구 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내 것인데 고작 저런 사람하고 결혼을 시키다니.


그럴수록 더 부모와 멀어지고 벽을 세우고 계속 그 벽을 보수해서 그나마 내놓은 마음의 창문까지 죄대 메우는 줄도 모르고. 딱한 노릇이지. 이미 창문을 반쯤 메운 나는 그 너머로 부모를 흘낏 본다. 


벽 너머의 엄마는 내가 벽 밖에 그려놓은 모습을 나인 줄 알고 만족한다.


그럼 됐다. 엄마가 만족한다면 계속 벽과 대화하도록 두면 그만이다. 

나는 엄마가 싫어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와 그 벽 안에서 안락하고 안전하게 생을 꾸려나갈 수밖에.


그렇지만 나의 행복과 부모의 행복이 영영 같은 노선 안에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가끔 참 얄궂다. 

되도록 비슷한 부류의 사람끼리 부모 자식 사이로 엮이도록 운명이 짜인다면 참 좋았을 텐데. 







작가의 이전글 친구가 없는 부부의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