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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Apr 19. 2020

가내 식탁은 평안하신지요

식탁 위에서 엇갈리는 부부의 취향에 대하여


예전에 읽었던 단편 소설 중 이런 장면이 있었다.

모처럼 딸들과 아내가 집을 비운 날 혼자 주말을 보내는 중년의 남성이 대학생 때 많이 해 먹었던 요리(볶음국수였던 것 같다.)를 하기 위해 장을 보고 추억에 젖어 들떠서 자, 이제 볶아볼까 하던 순간 아내와 딸들이 돌아오자 머쓱해하던 장면 같은 것.

왜 그렇게까지 신이 난 걸까, 왜 어릴 때 먹던 음식을 그제야 해본 걸까.


누군가와 함께 살기 전에는 몰랐던 일이었지만 부부 사이에 전쟁이 터진다면 주요 발원지는 의외로 식탁 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활 반경이 겹쳐지면서 잠드는 습관, 각종 생활습관과 생리적인 부분들 모두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전쟁이 터지기 쉬운 곳은 역시 먹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었고.


연애 초반,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며 약간 스스로를 가공하기도 하는 바로 그때 우리가 자주 먹던 음식은 파스타였다. 뭔가 데이트를 하자면 파스타를 먹어야 할 것 같았고 화덕에 구운 것 같은 얇은 피자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국밥을 먹기는 좀 그렇잖아,라고 아내가 말한 적 있다.)

국밥이 어때서. 그런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서로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되도록 안전한 데이트 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으로도 바쁜 시기에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을 방법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을는지도 모르겠다.

긴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집에서 잔뜩 만든 팬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밖에서 외식으로 파스타를 먹는 일이 손에 꼽는다. 아내는 파스타를 먹느니 잔치국수 한 그릇이나 고기와 함께 나오는 비빔냉면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양식이 당긴다고 말하는 경우가 정말 정말 드문 사람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반대로 분식 외에 다른 메뉴를 고르라면 양식 쪽을 선호하는 사람이라 볼로네즈나 아라비아따 같은 토마토소스 파스타가 맛있는 집이라면 자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아내와는 굳이 같이 꼭 그런 곳만 가야 한다고 느끼질 않는다. 그냥 주변의 맛있는 냉면집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에 가깝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 대부분 양식을 먹는 경우가 많으니 굳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내를 끌고 나 혼자 맛있게 먹고자 하는 마음이 안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마음이 알아서 맞춰버리는지도 모르고. 

내 마음은 원래 그런 분야에선 무척 무딘 편이다.


외식은 취향 차이가 그럭저럭 합의가 되었는데 작은 전쟁의 서막이 터진 것은 어느 날의 식탁 위였다. 그것도 라면. 확실하게 기억하는데 라면이었다.


"면이 과자 같아. 바삭바삭하잖아."

먼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끓인 라면을 한 입 먹은 후 아내가 이런 뉘앙스의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속상하고 서운했을까. 보통은 미안하다는 감정을 먼저 느끼는 내가 그 날은 왜 그랬는지 화가 나서 입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라면 전쟁'의 서막은 진작부터 시작되어 있었을 것이다.

'부먹'이냐, '찍먹'이냐 하는 싸움과 비슷한 느낌으로 '면이 좀 불듯 푹 익힌 것'과 '약간 덜 익었다 싶을 만큼 꼬들한 것'의 싸움이었다고 해야 할까.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예고된 전쟁.


아니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타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저런 사소하고 웃기지도 않는 문제에 왈칵 울분 같은 것이 터져 나오는 것이란 걸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사실 내 생활 반경 안에 타인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런 유치한 것으로도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당시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명확하게 기억나는 한 가지는 내가 입이 여전히 툭 튀어나온채로 그 라면을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전부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이었으니 아직 연인관계였던 우리는 각자 흩어질 방도 없는 그 원룸 안에서 숨 막히는 침묵과 살기로 새파랗게 서늘한 공기를 고스란히 견뎌야 했을 것이다. 아, 라면이 뭐라고. 꼬들한 면과 푹 퍼진 면이 뭐라고.


그 일을 잘 넘겼더라도 2차, 3차 파동은 계속해서 밀려왔다.

또 기억나는 한 가지는 짜파게티를 끓일 때 뻑뻑할 정도로 바짝 졸이는가, 아님 자작하게 물을 남겨 조금 물기가 있는 상태로 먹는가 하는 차이에서 온 싸움이었다. 그때도 비슷한 양상이었는데 내가 끓이면 반드시 "떡진 것 같이 됐네. 물기가 없어서."같은 말을 듣고야 말았고 나는 짜파게티만 끓이면 물을 얼마를 남겨야 완벽하게 촉촉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몰라 긴장하곤 했다.

(지금은 더 간단한 방법을 쓴다. 아내에게 물어보면 된다. "물 이 정도 남기면 되겠지?"하고.)


그렇다. 

우리는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유난하게 식탁 위의 싸움은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서로에게라도 양보할 수 없는 민감한 부분이 되어 더 날카로워지곤 하는 것이다. 인간도 동물이라 먹는 것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걸까 싶은 재미있는 생각도 든다.


분명 계속 식탁 위 서로의 취향이 격돌하는 전쟁이 크고 작게 생기고 사라지고 또 절충되거나 새로운 취향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삼겹살을 바싹 익히는가 적당하게 익히는가, 주말 아침은 빵인가 밥인가, 그런 것들.


사실 나는 취향을 반드시 관철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아내의 취향을 따라서 먹는 것에 큰 무리가 없다. 내가 아내의 취향에 맞춰서 요리를 하려고 하면 조금 어렵지만 그 또한 물어가며 맞추면 되니까 그렇게까지 억울하거나 괴로워할 문제는 아니다. 

이런 부분이 잘 맞아서 우리가 또 이렇게 긴 시간 함께 한 공간에서 한 식탁을 공유하며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끔 그렇다.

첫 부분에 쓴 단편소설 속 중년 남자처럼 나도 어느 날 아내가 집을 비운 주말에 "좋아,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하는 식탁이다." 하고 들떠서 물기 한 점 없이 뻑뻑한 짜파게티와 아주 꼬들한 라면과 바싹 익혀 바삭거리는 삼겹살을 먹고, 아침은 무조건 빵에 잼을 듬뿍 발라(아내는 잼도 싫어한다) 소파에 눕듯 앉아 얌냠 신나게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일탈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합리화하며.


물론 가끔 전쟁이 터지더라도 식탁은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 함께 먹는 식사가 무척 기쁘고 즐거운 것이 자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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